대구 10·1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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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민중항쟁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와 영향 아래 발생하였지만, 지역별로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미리 통일적으로 준비되거나 철저히 계획된 사건은 아니었다.<ref>당시 경북, 대구 일대 지역의 전염병 확산과 미군정의 쌀배급 정책 실패, 미군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 사냥'(대구, 경북지역은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만큼 공산주의 활동이 왕성한 곳이었다.),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 등으로 불만에 쌓인 민중들의 불만요소로 터진것이 컸다.</ref> 이미 [[박헌영]]<ref>이 시기 박헌영은 9월총파업 발생 이전부터 월북한 상태였다.</ref>, [[이강국]], [[이주하]] 등 간부들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져 일부는 월북하고 일부는 체포되었으므로,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은 전국 단위의 조직적인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구미 사건]]은 대구폭동에 영향을 받고 발생하였고, 달성군, 성주군, 칠곡군, 영천군, 의성군, 선산군, 군위군, 경주군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지만, 일반적으로 사태의 단위는 [[군 (행정 구역)|군]] 이상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
 
|저자=윤석원∙이심철
|출판사=대구일보
|작성일자=2007-02-08
|확인날짜=2008-06-22
}}</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극도의 정치적 무권리와 민족적 불행, 인간 이하의 생활을 강요하는 미제의 야만적인 식민지파쑈통치에 여기저기에서 반기를 들고나선 남조선인민들의 항쟁"으로 보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로동신문 10월항쟁용사들의 넋을 이어 반미투쟁을 과감히 벌리자
|출판사=조선중앙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