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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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국민대표회준비회===
그러나 '''국민대표회준비회'''의 활동은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옹호파의 반대, 대회경비에 따른 자금난 등으로 인해 부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은 [[워싱턴 D.C.|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두 회의 개최 기간 중에는 일시 중단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2>Hdic http://hdic.kr/wiki3/index.php/국민_대표_회의{{깨진 링크|url=http://hdic.kr/wiki3/index.php/%EA%B5%AD%EB%AF%BC_%EB%8C%80%ED%91%9C_%ED%9A%8C%EC%9D%98 }}</ref> 그러나 두 국제회의에서 예상과 달리 큰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결국 국민대표회준비회는 1922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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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5월 '''국민대표회준비회'''는 ''소집 선언서''를 발표하고 9월 1일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다. 이후 각처에서 '''국민대표회의 촉성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3일'''에 개막하였다. 여기에는 국내·[[상하이]]·[[만주]]일대·[[북경]]·[[간도]]일대·[[노령]]·[[미주]] 등의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여 명의 대표들이 모였으며 최종적으로 '''125명의 대표가 확정'''되었다.<ref>윤대원, 국민대표회의 이후 개조파의 정국쇄신운동과 국무령제의 성립, «역사연구 제7호», 76쪽</ref>
 
먼저 [[안창호]]를 임시의장으로 한 예비 회의에서 본회의에 상정할 안건이 심의되고, 1월 31일부터 [[김동삼]]을 의장으로 본회의가 시작되었다.<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www.encykorea.com/encyweb.dll?TRX?str=13892&ty=2{{깨진 링크|url=http://www.encykorea.com/encyweb.dll?TRX%3Fstr=13892&ty=2 }}</ref> 국민대표회 본회의에서는 먼저 주비위원장 [[남형우]]의 경과보고가 있었고, 곧이어 회의를 진행할 의장단 선출에 들어갔다.
 
의장단의 구성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독립운동단체들의 지역적 기반을 고려하여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윤해]]·[[안창호]] 등을 뽑았다. 본회의는 회의규정 및 일정을 마련하고 독립운동방침을 효율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군사·재무·외교·생계·교육·노동 등 6개 분과를 두었다. 회의는 분과를 중심으로 제반 문제를 구체적으로 토의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시국문제,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에 관한 의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의견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ref>강만길 외 173명, 창조-개조파의 대립, «한국사», 한길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