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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uengbokheon.jpg|섬네일|[[창덕궁]] [[대조전]]에 있는 흥복헌. 1910년 8월 22일 이곳에서 한일 병합 조약을 찬성하는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옛 건물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건물을 1920년 중건한 것이다.]]
 
일본 제국은 병탄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에게 ‘병합청원’의 시나리오를 준비시키고 있었다. [[송병준]]은 이에 앞서 [[1909년]] [[2월]]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매국흥정을 벌였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합병’을 역설한바 있었으나 일본 제국 측의 병탄 계획 때문에 일이 늦어지게 되자 직접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 등 일본 제국의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이완용]]은 송병준의 이런 활동을 눈치채고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緑)와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제국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아 미도리와 교섭에 나서도록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