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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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al of the Empress Myeongseong 02.jpg|섬네일|right|250px|명성황후 옥보의 보면 (1921년 제작)<ref>{{서적 인용|저자=국립고궁박물관|제목=왕의 상징 어보|날짜=2012-07-27|출판사=국립고궁박물관|id=ISBN 978896325901703600|쪽=235}}</ref>]]
'''명성태황후 민씨'''({{중세 국어|명셩ᄐᆡ황후 민시}}, 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11월 17일]] ~ [[1895년]]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추존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ref name="empr p20">《명성황후와 대한제국》, 18~20쪽.</ref>,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 출신지는 [[경기도|경기]] [[여주시|여흥]]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ref>장경순.[http://www.newsface.kr/news/news_view.htm?news_idx=2579 굳이 민비라고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 {{웨이백|url=http://www.newsface.kr/news/news_view.htm?news_idx=2579# |date=20120324134025 }}.뉴스페이스.2011년7월25일.</ref><ref>장경순.[http://www.choic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0 '닥터진' 이하응 따위가 위인이라고?] 초이스경제 2012년8월29일.</ref>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한테 겨냥하는 견제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당한 이후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화시책을 통해 친일 성향을 띤 급진 개화파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다가 흥선대원군과 주조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공모에 의해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암살당했다([[을미사변|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a_10012013_002&grp=&aid=&sid=5227653&pos=0 고종 1권, 즉위년 총서], 1863년 12월 13일 《고종실록》 총서</ref> 정식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9A%A8%EC%9E%90%EC%9B%90%EC%84%B1&keyword=%ED%9A%A8%EC%9E%90%EC%9B%90%EC%84%B1 순부 12권, 14년(1921 신유 / 일 대정(大正) 10년) 3월 9일(양력) 2번째 기사]</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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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태황후 민씨'''는 [[1851년]] [[11월 17일]]([[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ref name="empr p20" /><ref>정교(鄭喬), 《대한계년사》병인(1866)년 고종 3년 기사.</ref>(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ref>{{웹 인용
| url = http://portal.nricp.go.kr/search/meta_view.jsp?log_id=guest&identifier=2008-044733&flag=N
| 제목 = 문화유산학술연구정보지식포털 :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
|확인날짜 = 2008-05-29
| 저자 = 국립문화재연구소
|형식 = HTML
|발행인 = 국립문화재연구소
|언어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81025111609/http://portal.nricp.go.kr/search/meta_view.jsp?log_id=guest&identifier=2008-044733&flag=N#
|보존날짜 = 2008-10-25
|깨진링크 = 예
}}</ref>)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ref name="한20">한영우, 20쪽에서.</ref> 어릴 적 이름은 자영이었다.<ref>이영래 엮음, 《조선왕세보》 (1997년), 412쪽에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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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murderers of Empress Myeongseong.jpg|섬네일|left|210픽셀|명성황후의 죽음을 낳은 낭인들([[한성신보]] 사옥 앞에서)]]
{{본문|을미사변}}
[[1895년]] [[8월]]에 명성황후는 죽고 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음모가 일본 공사 겸 예비역 [[일본 제국 육군|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와 8월 15일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lang|ja|楠瀬幸彦}}), [[사무라이|로닌]] 두목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과 함께 꾸미어졌는데, 명성황후의 죽음은 일본인 군인들과 로닌들이 맡고, 대외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발표하는 것이 골자였다.<ref name="황616">황원갑, 616 ~ 617쪽에서.</ref> 8월 16일 대원군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맹세에 자필로 서명했다.<ref name="dong22">{{저널 인용|저자=윤덕한|날짜=1999-08-19|제목=민비는 외세 끌어들인 장본인|저널=뉴스플러스|권=|호=|쪽=64-65|id=|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197/np197nn010.html|확인날짜=|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202122524/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197/np197nn010.html#|보존날짜=2014-02-02|깨진링크=예}}</ref> 그 내용은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미리 언약을 받아 둔 것이다. 이날 대원군은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준용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필로 각서에 서명했다.<ref name="dong22"/>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명성황후 암살 작전이 그들에 의해 결행에 들어갔다. 대원군이 은거했던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我笑亭)에, 일본군은 로닌과 일본 군인, 명성황후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 300명가량을 모았다. 대원군은 미우라와 결탁하고 합의하여 가마에 태워져 경복궁으로 나아갔다.<ref name="임384"/><ref name="임385">임중웅, 385 ~ 387쪽에서.</ref> 대원군은 먼저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아 마땅하다는 주장의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를 내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다. 이 고유문의 내용은 '민씨 일가의 척족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ref name="dong22"/> 이를 대원군은 제 자필로, [[일본]]의 강요도 없이 적어놓았다. 대원군이 이런 글을 적는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 글을 미리 들은 조선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매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원군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그러했는지 본인의 의지로 그러했는지는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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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SBN|89-7474-870-3}}
|페이지=190~198쪽
}}</ref> 명성황후가 사진을 기피한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으며, 그 밖에 동시대에 살던 [[이승만]]이 자신의 저서 《[[독립정신]]》에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언급한 사진이 한 개 기록에 남겨져 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8/h2010080921075984330.htm "명성황후 시해 진실은 비공식 기록 행간 속에"]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8/h2010080921075984330.htm# |date=20100825052112 }} 한국일보, 2010년 8월 9일</ref> 그러나 [[이승만]]의 저서에 나온 사진도 명성황후인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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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palace-woman in full regalia.jpg|오랜 기간 명성황후로 알려진 사진.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에 A PALACE WOMAN IN FULL REGALIA(예복을 입은 궁녀)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