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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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파벌의 영수였던 [[모리 요시로]]가 수상으로 조각한 [[2000년]]의 [[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 (중앙 성청 개편 전)|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에서, 나중에 총리대신이 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추천으로<ref name=naz2>[http://news.livedoor.com/article/detail/2473487/ ‘인간・아베 신조의 실상’(2)], 라이브도어 뉴스, 2006년 9월 19일자.</ref> [[일본 내각관방|내각관방]] 부장관에 취임한다. 모리 내각의 뒤를 이어 출범한 [[2001년]]의 [[제1차 고이즈미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파일:Robert Zoellick meets Shinzo Abe 2006-01-23.jpg|오른쪽|섬네일|[[2006년]] [[1월]], [[로버트 졸릭]] 미국 국무부 차관과 만난 아베 신조.]]
[[2002년]]의 고이즈미 총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을 수행하고, 고이즈미 내각총리대신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안이한 타협은 안된다’며 강경론을 주창했다. 이후 납치 피해자 5명은 귀국했지만, 일본 내에서는 납치문제의 타협에 난항을 거듭했다. 이후 아베는 [[나카야마 교코]]와 함께 북한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경제제재와경제 무력행사를제재와 무력 행사를 포함한 강경 노선을 고집했다. 대화 등의 신중론을 취한 의원들이 많던 가운데, 언론은 아베를 두고 ‘의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미화하면서 이후 인기가 상승했다.
 
[[2003년]] 9월에는 고이즈미 총리대신에 의해 [[자유민주당 (일본)|자민당]]의 [[간사장 (일본, 정당)|간사장]]으로 발탁되었다. 3선의 [[국무대신 (일본)|국무대신]] 경력도 없는 젊은 의원이 간사장에 취임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11월의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총선거]]를 앞두고 아베의 ‘인기’를 필요로 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후 자민당은 총선거에서 절대 안정 다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