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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년]], 결국 수나라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터지고 말았다. 양광이 너무 백성을 혹사시킨 것과 무리한 고구려 원정이 근본적 원인이고, 게다가 기근과 수해가 겹쳐 반란을 더 부채질했다. 이러한 반란은 120여 건에 달했고, 그 규모도 엄청났다. 그리고 이 반란군 가운데 양광의 이종사촌형인 태원 유수 [[이연]]도 있었다.
 
이연은 장안으로 들어가,들어가서 양광을 [[태상황]]으로 만들고, 황태손 [[수 공제|양유]]로 하여금 황제로황제를 잇게잇도록 하여해서 황실의실질적인 실질적황실 지배자가 된다. 급박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양광은 강도(양주)에서 사치와 방종, 여자들을 탐했다. 양광은 자신에 의해 혼란에 빠진 수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전혀 반성하지 않았고, 사치스런 생활을 계속했고 의녕 2년인 [[618년]] [[3월 11일]] 강도에서 호화스럽게 생활하다가 자신의 근신이자 고구려의 원정군 사령관이었던 [[우문술]]의 아들인 근위장 [[우문화급]]이 반란을 일으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50세였다. (후에 양유는 이연에게 처형당한다.)
 
이렇게 수나라는 3대 3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사후 그는 세조 명황제(世祖 明皇帝)로 추증되나, 널리 양제(煬帝)로 불린다. 양제라는 시호는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기 위해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여기서 '양(煬)'은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그의 묘는 [[양저우]] 근교의 레이탕(雷塘)이라는 곳에서 황릉으로 불리지 않은 채 양광지묘(楊廣之墓)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나 [[2013년]] 양저우에서 수 양제의 진짜 무덤이 발굴되었다.<ref>http://news.donga.com/3/all/20131118/58957418/1</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