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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태국의 역사}}
[[파일:BlackCeramicBanChiangCultureThailand1200-800BCE.jpg|섬네일|150px|left|반치앙 문화의 토기]]
=== 토착문화토착 문화 ===
타이족(族)이 인도차이나 반도를반도에 남하(南下)하여 언제 현재의 태국에 정주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태국에는 [[반치앙 문화]] 때부터 여러 다양한 토착 문화가 존재하여 왔다.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태국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이웃한 [[동남아시아]]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 수코타이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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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독립 국가 ===
이와 같이 태국에서는 왕조가 4차례 바뀌었으며 현재는 [[짜끄리 왕조]]가 통치한다. 유럽 세력들은 [[16세기]]부터 태국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유럽 열강의 진출이 극심하여, 미얀마 등 주변국들이 [[프랑스]]와 [[대영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에도 태국은 독립국으로 계속 존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나라이다. 이것은 19세기 태국에 매우 유능한 통치자가 오랜 기간 통치를 하였고, [[프랑스]]과 [[대영제국대영 제국]] 사이의 경쟁의식과경쟁 의식과 긴장감을 이용하는 정치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 위로부터의 사회개혁사회 개혁 ===
유럽의 학문과 기술도입에기술 도입에 적극적이던 [[라마 4세]](재위: 1851년 ~ 1868년)의 뒤를 이어 [[라마 5세]] 출라롱콘대왕(재위: 1868년 ~ 1910년)은 쇄국제도를쇄국 제도를 풀고 개국하여 1855년 [[영국]]과 통상 우호 조약을 맺었다. 부역제도와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사법]]·[[교육]] 제도를 근대화하는 한편 철도·통신사업도통신 사업도 추진하였으며 사회의 모든 방면을 개혁하였다. 이러한 개혁노력에도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무역 이익을 위하여 주요 조계(租界)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태국은 영국에게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말레이 반도의 크다(Kedah)·프를리스(Perlis)·트렝가누(Terengganu)·클란탄(Kelantan)<ref>이 곳은 나중에 [[말레이시아]] 북부의 주가 된다.</ref> 을, 프랑스에게는 메콩강 왼쪽 연안의 라오스를 떼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빠따니라 불리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나머지 지역<ref>이는 다시 4개의 구역으로 세분된다.</ref>은 오늘날에도 태국의 영토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태국은 유럽의 2개의 식민 지배 권력의 식민지가 된 동남아시아에서 완충국으로 남게 되었다. [[라마 4세]] 때 문호를 개방하였고, [[라마 5세]]는 국가를 개혁하였다. 라마 5세는 지식인에게 해외 유학(留學)을 장려하였고, 관료로 삼았다.
 
=== 제1차 세계대전세계 대전 ===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1917년]]에 [[연합국]] 편으로 참전하게 된다. 전후 승전국으로 처리되어 [[국제 연맹]]에 가입할 수 있었고,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태국의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1932년에 무혈 쿠데타, 즉 입헌 [[혁명]]이 일어나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뀌어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송크람 대령이 이끄는 [[군부독재]] 정권이 국왕 [[라마 7세]]를 [[영국]]으로 추방하고 [[1992년]]까지 60년간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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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 태국은 [[미군]]의 기지 역할을 했다. 이 기간에 미국의 경제, 문화적 영향력이 많은 태국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방콕의 유명한 환락가가 생긴것도 미군들의 수요 때문이다.
 
=== 군부독재정권과군부 독재 정권과 민주화 운동 ===
이 나라는태국은 [[반공반공주의]](反共主義) 앞세운 군부독재정권의군부 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쿠데타]]를 경험하였다. [[1970년대]] 학생운동이학생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민주화 요구와 좌우갈등이 심해졌다. 이념갈등과이념 그로인한갈등과 정치혼란은그로 인한 정치 혼란은 결국 [[1976년]] [[탐마삿 대학교]]에서 최소 46명의 학생 시위대가 군과 우익 준군사조직에준군사 조직에 학살당하는 사건을 초래했다. [[1987년]] 방콕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 이후로도 [[1991년]]에 수친다 장군의 [[쿠데타]]로 군부독재정권이군부 독재 정권이 다시 연장되었고, [[1992년]] 군의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방콕에서 최소한 50명이 사망하였다. 결국 [[라마 9세]]의 명령에 의해 수친다 장군이 사임하면서 정치적 민주화를 거두었다.
 
=== 공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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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내부에서도 [[공산당]]이 존재했다. 전성기에는 [[베트남]]에 이어 동남아시아에서 2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며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내분과 정부의 사면정책으로 쇠락했다. 지금도 공산당 활동은 불법으로 남아있다.
 
=== 경제기적과경제 기적과 위기 ===
[[1980년대]]부터 태국은 저렴한 노동력으로 [[일본]]등 선진국의 투자처로 떠올랐다. 태국 경제가 수출주도형으로 재편되면서 쌀등 전통적인 수출품이 공산품에 자리를 내주었다. [[1985년]]과 [[1996년]] 사이 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태국을 강타하였고 태국의 화폐인 [[태국 밧|밧]]은 1 미국 달러 당 56밧까지 치솟았다([[1997년]] 이전에는 대략 25밧이었다). [[1998년]] 태국의 경제 성장률은 -10%까지 떨어졌지만 곧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해 [[IMF국제 통화 기금]](IMF)의 차관을 상환했다. 그 이후로 밧은 다시 평가절상되기 시작하여 2012년 12월 현재는 30밧 정도이다.
 
=== 탁신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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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외 관계 ==
{{본문|태국의 대외 관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태국의 여론은 친[[독일]]이었다. 일찍이 [[프랑스]]와 [[영국]]에는 많은 영토를 빼앗긴 적이 있었던 데 비해, 독일은 철도 개발에 도움을 주었고, 태국의 영토에 야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마 6세]]는 1914년 중립을 선포하고 전쟁이 종반에 이를 때까지 계속 중립입장을 고수하였다. 1917년 [[미국]]이 대독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 측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라마 6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다. 이와 같은 형식적인 참전이 타이에게태국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다. [[파리 강화 회의]](1919년)가 열렸을 때 태국은 전승국의 입장으로 참가하고 [[국제연맹국제 연맹]]의 창설과 함께 정회원국이 되어(1920년) 불평등조약을불평등 조약을 갱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태국 외교는 이중외교이중 외교(dual diplomacy)이고, 주위 정세에 따라 유연히 흔들리는 대나무외교(bamboo diplomacy)였다.<ref>한국태국학회, 《태국의 이해》 (동남아학총서2),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5)33쪽</ref>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열강의서구 열강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반공주의]]에 기초하여 [[미국]]과 적극적으로 친밀 관계를 맺어 많은 경제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냉전데탕트]] 종식과 함께계기로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돈독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왔고, [[대한민국]]과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다.
 
== 경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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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태국의 교육}}
===== 유치원 =====
태국의 교육 제도는 [[유치원]] 제도가 이미 기본적으로 정착되어 왔으며, 초 중 고 대학교의 기본 학제가 [[한국]]과 같거나 비슷하게 운영된다. [[유치원]] 및 영아 유치원 교육은 [[교육]]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라기보다는,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타이에서는태국에서는 일할 수 있는 여자들의 절반이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 모두 직장을 다니는 맞벌이 부부가 많다. 그래서 부모의 출근 시간대에서부터 퇴근 시간대까지 아이들을 돌봐 주는 탁아소의 역할을 부담하는 요금에 따라서 탄력 있게 감당하고 있다.
 
===== 진학 =====
타이에서태국에서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좋은 [[고등학교]]를 나와야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상급학교 진학은 시험을 통하여 하기 때문에 원하는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좋은 [[중학교]]를, 좋은 중학교를 위해서는 좋은 [[초등학교]]를, 좋은 [[초등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좋은 [[유치원]]을 나와야만 한다. 따라서 [[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집]]에서 좀 멀고, 힘이 들더라도 좀 더 나은 유치원에 보내려고 애를 쓴다. 비판적으로 보면, 타이에서태국에서 [[교육]]의 기회는 자녀를 명문학교에 보낼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 소수 부유층들만 가질 수 있고, 대부분의 민중들에게는 처음부터 상당히 닫혀있는 것이다.
 
===== 중고교과정중고교 과정 =====
[[파일:นายกรัฐมนตรี เป็นประธานเปิดงานชุมนุมลูกเสือคาทอลิกโลก - Flickr - Abhisit Vejjajiva (30).jpg|썸네일|right|210px|태국의 보이, 걸 [[스카우트 운동|스카우트]]]]
타이에는태국에는 중학교, 고교고등학교 과정을 위해 각각 3년을 들여야만 하는 정규 학제 이외에도, 중고교 졸업장을 비교적 손쉽게 받을 수 있는 길이 여러 가지로 열려 있다.
 
# 주간에는 일하면서 야간 수업 또는 주말 수업으로 2년 정도 공부하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을 수 있는 준 정규 과정이 전국적으로 많은 정규학교에 병설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을 내면 졸업할 수 있다.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은 제때에 공부를 시작하지 못하고 2-3년 정도 자기 학년보다 늦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