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식스 왕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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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형태= [[전제군주제]]
|지도자_칭호= [[웨식스의 군주|군주]]<br>519년–534년<br>688년–726년<br>802년–839년<br> 871년–899년 <br>925년 이후
|지도자_이름=<br> [[웨식스의
|입법부 =
|사건제목 =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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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식스 왕국'''(Wessex, {{llang|ang|Westseaxna rīce|웨스트새악스나 리체}} - 서색슨 왕국)은 [[그레이트브리튼섬]] 남부에 있었던 [[앵글로 색슨족]]의 옛 [[앵글로색슨 칠왕국|칠왕국]] 가운데 하나이다. 519년 부터 [[애설스탠]]이 [[잉글랜드 왕국]]을 통합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웨식스의
8세기 동안 [[머시아 왕국]]의 [[헤게모니]]가 성장함에 따라 웨식스는 그 영향 아래 있었다. 이 무렵 지방 행정의 단위인 [[샤이어 (영국)|샤이어]]가 형성되었다. [[웨식스의 에그버트|에그버트]]는 [[서레이 왕국]], 서식스, 켄트 같은 [[둠노니아]] 지역과 [[에식스 왕국]], 머시아 왕국를 정복하였다. 에그버트는 [[노섬브리아 왕국]]에도 일정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머시아가 830년 다시 독립하면서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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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영향력이 사라진 가운데 [[앵글로-색슨]]의 [[앵글로색슨인의 브리타니아 정착|이주]]가 시작되었다. 비록 당시의 기록이 앵글족과 색슨족을 구분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 둘은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ref name="케네스" />{{참고 쪽|75-76}} 410년 이전에 이미 에식스 지역에 앵글로-색슨 용병이 로마의 지휘 아래 있었다.<ref name="케네스" />{{참고 쪽|75}}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고 오늘날의 잉글랜드 지역은 점차 앵글로-색슨화 되었다. 앵글로-색슨인들 자체가 유럽의 다양한 지역에 있던 게르만족의 혼합 문화였다. 초기 정착지의 고고학적 유물들은 독일 서부에서 스웨덴에 걸친 다양한 문화가 잉글랜드로 건너와 융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 가운데는 [[영어]]와 언어학적으로 친연 관계가 깊은 [[프리지아어]]를 쓰던 [[프리지아인]]들도 있었다.<ref name="케네스" />{{참고 쪽|77}} 이 과정에서 [[켈트족]]의 일파였던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 사이에 있었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전통적으로는 앵글로-색슨이 브리튼인들을 몰아내면서 점령하였다는 설이 유력하였으나, 20세기 이후 둘 사이의 융합 과정을 통해 앵글로-색슨 왕국들이 건설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최근에는 다양한 지역의 이주민들이 잉글랜드에 정착하면서 혼합 문화가 형성되고 이 과정에서 선주민인 브리튼인들과도 융합되었다고 본다.<ref> Heinrich Härke,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179/174581711X13103897378311 'Anglo-Saxon Immigration and Ethnogenesis'], Medieval Archaeology, 2011</ref>
물론 앵글로-색슨의 잉글랜드 정착이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수 많은 전설이 덧붙여져 더 이상 실존하였는 지 조차 확실하지 않은 [[아서 왕]]은 [[바돈산 전투]]에서 앵글로-색슨을 맞아 승리를 거두었다.<ref name="케네스" />{{참고 쪽|79-80}} 그러나 계속되는 앵글로-색슨의 확장을 막을 수는 없었고 브리튼인의 영역은 [[웨일스]]로 축소되었다. 알프래드 대왕 시기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495년
== 색슨족의 정착 ==
[[파일:Cherdik - John Speed.JPG|thumb|1611년 [[존 스피드]]의 《색슨 칠왕국》에 묘사된
웨식스 창건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록<ref name="Yorke2002">{{cite book|first1=Barbara|last1=Yorke|title=Kings and Kingdoms of Early Anglo-Saxon England|url=https://books.google.com/books?id=SOuGAgAAQBAJ&pg=PT31|date=1 November 2002|publisher=Routledge|ISBN=9781134707249|pages=130–131}}</ref>인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연대기는 이어서 포트(Port)와 그의 두 아들 비에다, 매글라가 501년 [[포츠머스]](Portsmouth, 포트의 포구)에 상륙하여 브리튼인 귀족을 살해하였다고 적고 있다.<ref name="Giles, p. 9">Giles, p. 9</ref> 508년
그 뒤를 이은 채울린은 581년 왕위에 올랐고 [[칠턴 구릉지]], [[글로스터]], [[서머싯주|서머싯]]까지 영토를 넓혔다. 채울린은 베다 베네라빌리스가 《[[잉글랜드 교회사]]》에서 언급한 일곱 왕 가운데 한 명으로 베다는 그를 잉글랜드 남부의 "임페리움"(imperium, 통치자)로 불렀다. 《연대기》는 채울린을 [[브레트왈다]](Bretwalda, 패자)로 호칭한다. 《연대기》의 기록은 종종 진위를 의심받는데
== 기독교의 도래와 머시아의 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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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년 첸웰흐가 사망하자 그의 부인 [[웨식스의 섹스부르흐|섹스부르흐]]가 왕위를 이었고, 1년 여 뒤 섹스부르흐 역시 사망하여 왕위는 방계인 애스크윈에게 이어졌다. 에스크윈의 제위 기간 역시 2년에 불과하였고 왕위는 다시 첸웰흐의 종질 첸트윈에게 넘겨졌다. 첸트윈은 브리튼인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사하였다. 웨식스의 왕위는 또 다른 방계인 [[웨식스의 채드왈라|채드왈라]]로 이어졌다. 채드왈라의 재위 역시 2년에 불과하였으나 그 시기 웨식스는 서식스, 켄트, 아이슬오브와이트 등을 점령하였다. 채드왈라는 688년 왕위에서 물러나 로마를 순례하였으며 그곳에서 [[교황 세르지오 1세]]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사망하였다.<ref>Kirby, D. P. (1992), The Earliest English Kings, London: Routledge, ISBN 0-415-09086-5, p.192</ref>
채드왈라의 뒤를 이은 웨식스의 왕은 [[웨식스의 이네|이네]]였으며 그 역시
8세기 동안 웨식스는 머시아의 헤게모니 아래에 있었고 웨식스의 왕은 머시아의 봉신으로 여겨졌고 머시아는 웨식스의 북쪽 영토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웨식스가 완전히 머시아에 복속된 것은 아니었으며 서쪽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날 [[데번 주|데번]] 지역에 해당하는 [[둠노니아]]를 정복하였다. 데번은 10세기까지도 독자적인 정권을 유지하였으나 [[데 팍토|사실상]] 웨식스의 지배를 받았다.(한편 12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오브 맘즈베리]]는 927년까지 웨식스와 데본이 "동등한" 관계에 있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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