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 (147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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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 등과의 갈등 ====
[[1539년]](중종 34년)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ref name="jangri001">[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76_1_0009168 이기: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ref> [[명나라]]에 다녀올 때 부사(副使) 원계채(元繼蔡)와 서장관(書狀官) 유공권(柳公權)이 중도에서 사망하는 일을 겪었으나 무사히 귀환하였다. [[1539년]] [[10월]]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이때 [[조선 중종|중종]]은 그를 [[병조판서]]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류관 (조선)|유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540년]] [[1월]] [[형조판서]], [[7월]] 상호군(上護軍), [[호조판서]]를 지냈다. 호조판서가 되자 [[7월 20일]] [[사헌부]]로부터 적임자가 아니라는 논박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7월 21일]] [[사헌부]]에서 재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며 이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지경연사를 겸하여 경연장에 참여하였다. 그해 [[11월 30일]] 다시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그 뒤 1541년 [[4월]] [[경연]]특진관(特進官), [[6월]] [[의정부]]우참찬, 8월 다시 의정부 우참찬이 되고, 9월 10일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닷새만인 [[9월 15일]] 병조판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