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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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위치==
당시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던 고구려 영지로, 고구려가 요하(遼河)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동성]](遼東城)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소재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금사》 지리지에 따라 만주 개평(蓋平) 동북의 탕지보(湯池堡)라 하기도 하고, 《이계집(耳溪集)》 또는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따라 만주의 봉황성(鳳凰城)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창다철도[長大鐵道]의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안촌홀(安寸忽)이다. 안시성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요새였으며 주변에 병기의 주원료인 철광석 산지와 곡창지대가 있었다. 신성(新城:지금의 만주 푸순[撫順] 부근)과 건안성(建安城:지금의 만주 가이핑[蓋平])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역의 여러 성들을 방어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烏骨城)·국내성(國內城)을 비롯하여 전국의 성을 수호하는 데에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