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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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노선의 일치보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시하여 모인 '''개조파'''의 [[안창호]]•[[여운형]]·[[김동삼]] 등은 [[상하이]]와 [[만주]]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개조파는 임정이 전 민족적 운동인 3.1운동의 결과물이며 현재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성립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해 왔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박윤재, 1920년대 초 민족통일전선운동과 국민대표회의, «학림 제17호»,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년, 170쪽</ref>
 
====개조파의조파의 탈퇴====
창조파는 1923년 3월 21일 의장이 개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여 본회의에서 탈퇴하였다. 창조파의 탈퇴로 본회의 개최가 불가능해지자 28일부터는 창조파와 개조파가 참여하는 비공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시국문제 토론을 유보할 것과 개조파인 [[안창호]], [[김철수 (1893년)|김철수]]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도록 설득할 것을 합의되었다. 4월 11일부터 다시 정식회의가 개회되었으나 '개조'와 '창조'를 둘러싼 시국문제에 있어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