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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의 실제 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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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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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산국 정벌 ===
지증왕 6년([[505년]])에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가 되었으며<ref>《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지증마립간, "6년 봄 2월 왕이 친히 나라안의 주와 군,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군주라는 이름은 여기서 시작되었다(六年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始於此)."</ref>, [[512년]]에는 이찬의 관등과 함께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해 신라 영토로 복속시켰다.<ref>《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4권 지증마립간, "13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로 조공하였다. 우산국은 명주(하슬라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리인데 험준한 지형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어리석고 사나우므로 위엄으로 오게 만들기는 어렵고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여럿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이사부는) 거짓으로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당장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하였다(十三年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獅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 則降)."</ref> 《삼국유사》에는 이사부(박이종)가 하슬라주 군주라는 지위를 우산국을 정벌한 공로로서 획득하게 된 것으로 적고 있어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지증왕 6년([[505년]])에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512년]]에는 이찬의 관등과 함께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해 신라 영토로 복속시켰다.(《삼국사기》) 《삼국사기》 지증마립간본기 및 이사부열전, 《삼국유사》 지철로왕조에 따르면, 우산국 즉 지금의 [[울릉도]](鬱陵島)는 하슬라주의 동쪽 바다 위에 떠있던 섬나라로서 육지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오가기가 쉽지 않다는 지리적 장점을 믿고 신라에 복속되지 않았는데, 하슬라주의 군주(軍主)가 된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이 용맹하기는 하지만 육지의 물속에 대해서는 다소 어둡다는 점을 발견하고, 힘이 아닌 꾀로서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나무로 만든 [[사자]]상을 배에 많이 싣고 가서 우산국 해안에서 "너희가 만약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이 짐승을 풀어서 너희를 모조리 짓밟아 죽여 버릴 것이다."라고 호령했고 우산국 사람들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비교해보면 이사부(박이종)가 우산국을 정벌할 당시 이미 이찬이라는 관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슬라주 군주라는 지위도 우산국을 정벌한 공로로서 획득하게 된 것으로 적고 있어 《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다.
 
=== 가야 정벌 ===
《일본서기》에는 법흥왕 16년에 해당하는 [[529년]] [[가락국]]의 4개 마을을 점령해 가락국을 보호령화<ref>《일본서기》 계체 23년 (529), "이에 신라는 상신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이사부)로 바꾸어 보냈는데 (신라에서는 대신을 상신이라고 한다) (어떤 책에는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知奈末)이라고도 한다) 3천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칙을 듣기를 청했다. 모야신(毛野臣: 오미노 케누)이 병사 수천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는 웅천에서 나와 임나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갔다. 이사부는 다다라 평야에 머물며 삼가 석 달을 기다려 칙을 듣고자 자주 청했으나 끝내 선포하려 하지 않았다. 이사부가 거느린 병졸들이 취락에서 밥을 구걸하다가 모야신의 종자 하내마사수어수(河內馬飼首御狩)와 마주쳤다. 어수는 다른 문에 들어가 숨어 걸식자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멀리서 주먹을 날렸다. 걸식자들이 이를 보고 "삼가 석 달을 기다리며 칙지를 듣기를 기다렸지만 오히려 보이려 하지 않고 칙지를 들으려는 이를 괴롭히는 것은 곧 속여서 상신을 죽이고자 함이로다."라 하였다. 그리고 본 바를 낱낱이 상신에게 알렸다. 상신은 금관金官, 배벌背伐, 안다安多, 위타委陀 4개 마을을 약탈했다. 어떤 책은 다다라多多羅, 수나라須那羅, 화다和多, 비지費智 4개 마을이라 한다(由是 新羅 改遣其上臣伊叱夫禮智干岐 新羅以大臣爲上臣 一本云 伊叱夫禮知奈末 率衆三千 來請聽勅 毛野臣 遙見兵仗圍繞衆數千人 自熊川入任那己叱己利城 伊叱夫禮智干岐 次于多々羅原 不敬歸待三月 頻請聞勅 終不肯宣 伊叱夫禮智所將士卒等 於聚落乞食 相過毛野臣傔人河內馬飼首御狩 御狩 入隱他門 待乞者過 捲手遙擊 乞者見云 謹待三月 佇聞勅旨 尚不肯宣 惱聽勅使 乃知欺誑誅戮上臣矣 乃以所見 具述上臣 上臣抄掠四村 金官 背伐 安多 委陀 是爲四村 一本云 多多羅 須那羅 和多 費智爲四村也)."</ref>하는 한편 [[탁순국]]의 웅천(熊川)을 공격해 가락국의 부흥을 지원하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臣)의 왜병을 패퇴시키고, [[법흥왕]](法興王) 18년([[531년]])에는 [[칠원군|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격파하여 이듬해에 [[금관국]]을 신라에 합병시켰다.
《일본서기》에는 법흥왕 16년에 해당하는 [[529년]] [[가락국]]의 4개 마을을 점령해 가락국을 보호령화하는 한편 [[탁순국]]의 웅천(熊川)을 공격해 가락국의 부흥을 지원하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의 왜병을 패퇴시키고, [[법흥왕]](法興王) 18년([[531년]])에는 [[칠원군|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격파하여 이듬해에 [[금관국]]을 신라에 합병시켰다.
 
《삼국사기》 이사부전 앞에는 [[탈해왕]](脫解王) 시대의 인물로서 당시 신라와 이웃해 있던 우시산국(于尸山国)과 거칠산국(居柒山国)을 정벌한 거도(居道)라는 인물의 열전이 실려 있는데, 많은 말을 모아놓고 병사들에게 말 위에서 하는 마상재를 매년 열어서 두 소국 사람들 앞에서 늘 보였고, 두 나라 사람들이 마상재를 보며 어느 순간 방심하면서 신라군을 방비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두 나라를 급습해 멸망시켰다고 적고 있다. 이사부전은 지증왕 때에 연해의 지방관이 된 이사부가 거도의 계략을 써서 가야를 멸망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법흥왕 19년에 해당하는 [[532년]]에야 신라가 [[금관국]]을 멸망시켰다고 했으며, 이사부에 의한 가야 정벌 기사는 《삼국사기》에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년]])조에 수록되어 있고 열전에는 진흥왕본기에 해당하는 기사가 실려있지 않은데, 거칠부열전의 가야 정벌 기사는 본가야(금관국 및 대가야)의 점령이 아니라 당시 가야 연맹 가운데 일부를 점령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ref>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698</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