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약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날짜 변수 정리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봇: 광둥 성 출신을(를) 광둥성 출신(으)로 분류 대체함; 예쁘게 바꿈
1번째 줄:
[[파일:湛若水.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200px|담약수]]
'''담약수'''(湛若水, 1466년~1560년)는 [[중국]] [[명나라]]의 유학자이다. [[자 (이름)|자]]는 원명(元明), [[호 (이름)|호]]는 감천(甘泉)이며, [[광둥 성]] 증성(增城, 지금의 [[광저우 시]] [[쩡청 구]]) 출신이다.<ref name="두피디아">{{웹 인용|제목=담감천|url=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34653|웹사이트=두피디아|출판사=두산|확인날짜=2017-11-09}}</ref>
 
5번째 줄:
[[진헌장|진백사]](陳白沙)에게 배워 정좌침잠(靜座沈潛)의 수련을 쌓아 사관(仕官)이 되려고 했으나, 어머니의 명으로 남경국자감(南京國子監)에 들어가 40세 때인 [[홍치]](弘治) 18년(1505년), 을축과(乙丑科)에서 [[진사 (칭호)|진사]]에 올랐다. 이후 서길사(庶吉士)에 뽑혀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가 되었고,<ref name="두피디아"/> 직책이 예부·이부·병부 [[상서]]에 이르렀다. 70세를 넘어 사직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담약수는 진헌장의 뒤를 이어 영남학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남악(南岳) [[형산]](衡山) 자운봉(紫雲峰) 아래 있던 형악사(衡嶽寺) 절터에 건물을 짓고 감천정사(甘泉精舍)라 이름 지었다. 그곳에서 담약수가 강학을 하니, 사람들이 감천서원(甘泉書院)이라 불렀다.
 
== 사상 ==
한림원편수 시절, 이부(吏部)에 있던 [[왕양명]](王陽明)과 함께 유학을 연구했다. 진헌장에게 배운 담약수는 치양지설(致良知說)을 내세우는 왕양명과 논란하여 양보하는 일이 없었고, 당시의 학자는 왕 ·담의 두 파로 나누어졌다고 한다. 또 이르는 데마다 반드시 서원을 세워 진헌장을 모셨고, 문하생이 널리 여러 곳에 있었다.<ref name="두피디아"/>
 
담약수는 왕양명보다 6살 많은데, 뒤에 양명의 묘지명을 썼다. 양명이 강학할 때 담약수가 가장 먼저 동참했다. 담약수 사상의 본령은 ‘체인천리, 전소습심’(體認天理, 煎銷習心)인데, 양명의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欲)과 서로 비슷하다.<ref name="유명종">{{서적 인용|저자=유명종|제목=송명철학|날짜=1976-07-10|쪽=349|출판사=형설출판사|확인날짜=2017-11-10}}</ref> 그들 사이의 불일치는 다만 격물(格物, 사물의 탐구)을 해석하는 데에만 있다.<ref>{{서적 인용|저자1=Carsun, Chang|저자2=이진표 역|제목=신유학사상의 전개(Ⅱ)|날짜=1997-02-10|출판사=형설출판사|쪽=100|확인날짜=2017-11-10}}</ref>
 
저술은 아주 많은데, 《심성도설》(心性圖說), 《격물통》(格物通), 《준도록》(遵道錄), 문집에 《감천집》 등이 있다.
27번째 줄:
[[분류:중국의 철학자]]
[[분류:16세기 철학자]]
[[분류:광둥 성광둥성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