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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영제기: 청류 소장파 명사 ===
원소는 고조부 [[원안]](袁安) 이후 4대 연속 [[:wikt:삼공|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던 명문 가문 출신으로, 용모가 수려하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어려운 일을 잘 도와주어 젊어서부터 지도자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사세삼공(四世三公)의 적장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로 그려지나, 태어날 때 부친인 [[원성]](袁成)이 죽어 유복자로 자랐으며 모친은 노비였다.<ref>한편으로는 [[원봉 (후한)|원봉]](袁逢)의 차남이고, 일찍 죽은 [[원성]]의 양자로 입적되었다는 설도 있다. ([[진수 (서진)|진수]](3세기), 《[[삼국지]]》 〈[[:s:삼국지 (진수)/권6|권6]]〉 〈원소전〉의 [[배송지]] 주석 중 “紹即逢之庶子,術異母兄也,出後成為子。” (원소는 원봉의 서자인데, 이복 형에게 술수를 써서, 출생 후에 원성(袁成)의 아들이 되었다. ))원소가 서자라는 기록은 양쪽 설 모두 동일하다.</ref> 원소는 천출이었으므로 비록 [[효렴]](孝廉) 등의 천거를 받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당시 삼공의 눈에 들어 삼공부로부터 직접 벽소되는 상당히 파격적인 절차로 20세의 나이에 복양장(濮陽長)으로 부임하였다. 임지에서는 깨끗한 정치로 명성을 얻었으나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적모의 상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복상이 끝나자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을 추감하며 또다시 3년의 상을 치르는 한편 이후에도 병을 핑계로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당시 후한에서는 삼년상을 치르는 관습이 거의 없었던 점과, 어려서 고아가 된 일을 추감하여 원소만이 다시 복상을 거친 것은 당시에는 그가 유일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청렴하고 올바른 정치를 추구했던 원소는 후한 말의 부패한 정치 현실에 대해 적잖이 실망하여 벼슬길을 피한 것으로 생각된다.
 
6년의 상을 치르고 벼슬에 나서지 않는 동안에 원소는 [[장막 (후한)|장맹탁]]·[[하옹|하백구]]·오자경(吳子卿)·[[허유|허자원]]·오덕유(伍德瑜)·[[조조|조맹덕]] 등 많은 선비들과 더불어 사귀었고, 당시 후한의 정치적 부패의 요인이었던 [[환관]](宦官)들의 전횡을 비판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얻으며 청류파의 중심에 서게 되니 이에 환관들이 모두 원소를 미워하게 되었다. 십상시 [[장양 (후한)|장양]](張讓)과 중상시(中常侍) [[조충]](趙忠)은 원소에 대해 "저 아이가 끝내 무슨 일을 저지를 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원씨 가문은 환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원소의 숙부 [[원외]](袁隗)는 원소에게 "가문을 멸망시킬 작정이더냐"라고 크게 꾸짖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에 원소가 천거에 응하여 벼슬을 시작했다는 기록<ref>〈원소전〉의 [[배송지]] 주석 중 “紹於是乃起應大將軍之命。” (원소는 이에 비로소 다시 대장군의 명령에 응했다.)</ref> 이 있고, 끝내 원외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어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184년]]([[광화 (후한)|광화]](光和) 7년) 무렵에는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의 속관으로 다시 벼슬을 시작하였다.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더 이상 조정의 혼란을 묵과할 수 없다는 청년다운 정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 소제기: 맹진 방화조작사건과 십상시의 난 ===
[[189년]](중평 6년), 영제가 붕어하고 [[하진]]이 집권하여 환관들과 대립하자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하여 환관을 주살할 계획을 세워 [[하진]]에게 바쳤다. [[하진]]은 처음엔 원소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나 누이동생 [[하태후]](何太后)의 반대와 설득에 마음이 돌아선데다가 그 스스로가 환관과 결탁하여 출세한 것이었으므로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 이에 원소는 재차 [[왕광 (후한)|왕광]](王匡)·[[정원 (후한)|정원]](丁原)·[[교모]](喬瑁)·[[동탁]] 등 지방의 장수들을 수도 근교로 소집하여 하태후를 비롯한 환관들의 지지세력을 협박하는 계책을 세웠고 다시 [[하진]]을 설득하여 [[왕광 (후한)|왕광]]에게 강노수 5백을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오도록 하는 한편 [[교모]]는 성고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동탁]]은 관중(關中)으로 오도록 하고, [[정원 (후한)|정원]]을 시켜 흑산적으로 위장하여 맹진(孟津)을 불태운 다음 흑산적 소탕을 구실로 삼도록 했다.
 
원소의 협박이 거듭 이어지고 맹진의 불빛이 낙양에까지 비추게 되자 친 환관파 관료들은 모두가 두려워 떨며 십상시를 주살하라고 진언했으나 하태후만이 이를 듣지 않았다. 본디 십상시와 결탁하여 권력을 잡았던 [[하진]]은 이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내심 꺼려했으므로 행동이 지체되고 있었다. 원소는 [[하진]]을 만나 거듭 설득했고 이에 [[하진]]은 원소를 관리의 감찰과 낙양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례교위에 임명하고 가절을 내리는 등 막대한 권력을 부여한다. 이에 원소는 황실의 근위병들을 모두 자신의 심복으로 교체하며 태후와 환관들을 낱낱히 감시했는데 마침내 공포에 질린 하태후는 십상시 이하 고위직 환관들을 모두 파직시키자 십상시들은 모두 [[하진]]에게 가서 사죄하며 오직 [[하진]]의 조치에 따르겠다며 애원한다. 원소는 [[하진]]에게 십상시들을 모두 처형할 것을 세 번이나 간하였으나 [[하진]]은 모두 듣지 않았고 십상시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동탁은 제후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음수 (후한)|음수]](陰脩) · [[한융]](韓融) · [[호모반]](胡母班) · [[오수 (후한)|오수]](吳脩) · [[왕괴]](王瑰) 등을 각지에 사자로 보냈다. 원소는 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에게 음수와 오수를 죽이게 하였고<ref>〈원소전〉“卓遣執金吾胡母班、將作大匠吳脩齎詔書喻紹,紹使河內太守王匡殺之。”</ref>, 오직 한융만 명성과 덕망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 헌제기: 군벌화와 하북 통일 ===
초평 2년([[191년|191]]), [[공손찬]]이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 (후한)|한복]]이 지배하는 기주를 침공해 [[한복 (후한)|한복]]을 격파했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이었던 [[한복 (후한)|한복]]에게 부득이하게 종속되어 견제, 감시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나 배후에서 [[공손찬]]의 기주 공격을 조장한 흑막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복 (후한)|한복]]이 패배하여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내에선 반란이 일어났고, 흑산적(黑山賊) [[장연 (평북장군)|장연]]을 비롯해 [[어부라]](於夫羅)·[[장양 (치숙)|장양]](張楊) 등의 군벌이 기주를 넘보았는데 원소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패퇴한 [[장양 (치숙)|장양]]·[[어부라]]는 원소에게 항복했다. 이로 인해 기주 내에서 위세를 얻은 원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복 (후한)|한복]]을 설득하며 또한 협박했다. 겁에 질린 [[한복 (후한)|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한다.
 
[[흥평]](興平) 2년([[195년|195]]), 포구에서 원소군과 전투를 벌인 [[공손찬]]은 참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잃었고, 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그 위세가 극도로 약해져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손찬]]은 역경(易京)에 요새를 짓고 수비에 전념하였다.
 
=== 조조와의 대립 ===
초평 3년([[192년|192]]), [[동탁]]이 [[여포]](呂布)에게 살해된 이후, [[동탁]]의 잔당 [[이각 (후한)|이각]](李傕) 등이 장안에 내습하여 조정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흥평 2년, 마침내 헌제는 [[이각 (후한)|이각]]·[[곽사]](郭汜)에게서 벗어나고자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향한다. 이때 참모 [[곽도]](郭圖)는 황제를 영입하여 우리들의 세력권 내에 있는 마을로 천도를 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원소는 [[동탁]]이 임명한 [[헌제]](獻帝)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데다, 황실은 이미 쇠락하여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여겼으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 헌제는 [[조조]]에게 보호받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때까지 평범한 군벌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원소]]계 군벌로까지 분류되던 [[조조]]는 황실의 권위와 명망을 되살려내는 데 성공하며 명분을 얻었고, 그때까지 원소가 누려 왔던 명분적 우위를 뒤집어 버렸다.
 
이렇듯 대장군 취임을 놓고 벌어진 원소와 [[조조]]의 알력싸움은 원소의 승리라는 형태로 끝이 났고, 헌제라는 새로운 명분 아래의 1인자도 원소가 차지하는 듯 보였지만 양자의 충돌은 이미 시간 문제가 되어 있었다.
 
=== 후계자 선정 문제 ===
원소의 장남 [[원담]]은 사치스럽고 교만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원소는 이 무렵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도 고심하고 있었다.
원소는 막내아들 [[원상 (후한)|원상]]의 용모와 재능을 아꼈으나 [[원상 (후한)|원상]]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로 삼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원소의 총애를 받던 후처 유부인은 미소년이었던 [[원상 (후한)|원상]]을 심하게 편애하여 그를 강하게 지지했으며 원소 또한 [[원상 (후한)|원상]]을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원상 (후한)|원상]]이 장성하면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하고 [[원담]]을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자신의 호적에서 폐출시켰으며 청주의 도독으로 삼아 내보냈다. [[저수]](沮授)는 이에 대해 간언하지만 원소는 오히려 "다른 자식들도 각 주로 내보내 그 역량을 살펴보겠다"라고 말하며 무시했다.
이런 점에서 [[저수]]와 [[전풍]](특히 [[전풍]])은 [[조조]]의 라이벌이었던 원소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해 후세에 의도적으로 신격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관도전투와 그 이후 ===
건안 4년([[199년|199]]), [[공손찬]]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병합하였다.
이로써 그의 세력은 기주(冀州)·유주(幽州)·병주(幷州)·청주(靑州) 등 4주에 미치게 된다. 원소는 [[원담]]을 청주자사(靑州刺史), [[원희 (후한)|원희]](袁熙)를 유주자사(幽州刺史), 조카 [[고간 (후한)|고간]](高幹)은 병주목(幷州牧)<ref>'''병주자사'''(幷州刺史)라고 하는 문헌도 있다.</ref> 으로 삼아 각각 통치하게 했다.<ref>이들은 원소 생전에는 복종하였으나, 원소 사후 어리고 지지기반이 약한 [[원상 (후한)|원상]]이 집권하여 중앙의 감시가 소홀해지자 제각기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ref>
 
* 비록 [[진수 (서진)|진수]](陳壽)의 삼국지는 [[원담]]·[[원희 (후한)|원희]]·[[고간 (후한)|고간]]의 임명을 199년으로 서술했지만 [[원담]]은 이미 193년부터 청주에 부임한데다가<ref>《자치통감(資治通鑑)》</ref>, 196년에 정식으로 자사가 된 것으로 보이기에<ref>《후한서(後漢書)》</ref> 엄밀히 말해 삼국지의 기록은 틀린 것이다. [[고간 (후한)|고간]]과 [[원희 (후한)|원희]]의 경우도 임지에 부임한 해가 199년인지 알 수 없으며, 이는 아마 199년까지의 일을 축약해 적은 것으로 생각된다.
 
건안 5년([[200년|200]]), [[유비]](劉備)가 [[조조]]를 배반하고 서주를 점거해 원소와 동맹을 맺은 일은 모처럼 만나기 힘든 호기였으나 원소는 결정적인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고 있을 때, 참모 [[전풍]]이 [[조조]]의 배후를 찌르도록 진언했지만 자식의 병을 이유로 허가하지 않아 기회를 놓치고 만다. 결국 [[유비]]는 패배하여 원소에게로 도망쳐 왔다.
 
* 이때 원소가 아들의 병을 이유로 출병을 거절한 사건은 한 세력의 수장으로서 너무나 비상식적인 일이었을뿐더러, 일가가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을 때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던 이전 원소의 행동과도 반대되는 태도였기 때문에 단지 핑계였을 뿐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ref>이 직전 [[원술]]이 원소에게 의탁하려던 사건이 있었다. 원소는 공식적으론 [[원술]]의 칭제를 비난하며 역적으로 규정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론 은밀히 [[원술]]이 망명해 오는 것을 옳게 여겼다는 보이는 기록도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 [[원술]] 진영과 몇 차례의 연락이 오갔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칭제를 고려하는 등 이해에 따라서는 [[원술]]을 받아들일 생각도 있었던 모양이다. [[유비]]는 [[조조]]에게서 파견되어 이를 저지하며 [[원술]]을 방해했었는데, [[원술]]이 죽은 직후 [[조조]]에게 등을 돌려 원소와 손을 잡았다. 원소로서는 [[유비]]를 전적으로 신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아들의 병을 이유로 출병하지 않은 사건은 위서 원소전에만 기록된 일로, 무제기와 곽가전에서는 모두 '원소는 의심이 많으므로 서둘러 군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ref>
 
곧 본격적인 원소의 남진이 시작되었다. 원소군은 국지전에서 [[안량]](顔良)과 [[문추]](文醜)와 같은 유력 지휘관이 전사하는 등 손실을 입었지만, 사실 전황 자체는 순조로운 원소군의 우위로 진행되었으며 철수를 거듭하던 [[조조]]는 군세를 모아 관도에서 원소를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굳게 진영을 지킨다. 원소는 관도를 포위공격했으나 조조군 역시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므로 3개월 가까이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조조]]가 관도에서 고립되고 전황이 [[조조]]에게 점점 불리하게 되자, 원소의 선동공작이 효과를 거두어 [[조조]]의 세력권 내 여러 곳에서 원소에 호응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특히 예주의 경우는 단지 양안군(陽安郡)만을 제외한 모든 군현이 원소에게 호응해 반기를 들 정도였다.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조조]]는 패배직전의 위기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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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소의 친족관계 ==
[[파일:여남 원씨.png]]
 
=== 관련 인물 ===
[[원기]] [[원담]] [[원매 (후한)|원매]] [[원봉 (후한)|원봉]] [[원상 (후한)|원상]] [[원성]] [[원술]]<br>
[[원안]] [[원외]] [[원요]] [[원유 (삼국지)|원유]] [[원윤]] [[원평 (후한)|원평]] [[원희 (후한)|원희]]
* 『후한서』 권74, 「열전」64, 원소
* 『삼국지』 권6, 「위서」6, 원소
== 참고 문헌 ==
* [[진수 (서진)|진수]](3세기), 《[[삼국지]]》 〈[[:s:삼국지 (진수)/권6|권6]]〉 〈원소전〉
== 각주 ==
<references/>
[[분류:202년 죽음]]
[[분류:후한의 대장군]]
[[분류:원소와 주변 인물‎인물| ]]
[[분류:원술과 주변 인물]]
[[분류:허난 성허난성 출신]]
[[분류:후한말의 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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