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초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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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수도원에서 가까운 포사드지역에 지어졌고, 이 지역이 무역으로 발전했다. [[러시아의 이반 4세|무서운 이반]] 시절에는 중요한 요새였고, 러시아의 적군에 의해 수천번은 공격당했다. [[1581년]]에 [[스테판 바토리]]의 군대는 이 요새를 몇번 무력으로 정복하려고 했지만, 스웨덴인이나 폴란드인들이 [[1592년]], [[1611년]], [[1615년]], [[1630년]], [[1655년]]에서 [[1657년]]까지 요새를 몇번이나 정복했다.
 
[[대북방 전쟁]]이 한창일 때, 러시아인들은 [[1701년]]에 M. 셰레메테프의 명으로 페초리지역의페초리 지역의 요새를 다시 세웠다. [[1918년]] [[2월]]에서 [[12월]] 사이에 페초리는 독일인들이 점령했다.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이었을 때, 도시는 [[1919년]] [[3월 29일]]에 [[에스토니아인]]들이 점령했다. [[타르투 조약|타르투 평화 조약]]으로 페초리는 [[에스토니아]]의 영토로 들어갔고, 페초리는 ''세투마''(Setumaa)로 불리게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독립한 뒤 이후에는, ''페체리마''(Petserimaa, 페체리주) 페체리에 속하게 되었고 11개 군에 속했다. 표트르 교회는 이때 지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1941년]]에서 [[1944년]] [[8월 11일]]까지 이 지역을 점령했다. 1944년에는 에스토니아가 소련의 영토로 병합되었고, 페초리와 페체리 지역은 [[프스코프주]]에 속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