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촌리 학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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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8일 (목) 00:51 판

수촌리학살사건(水村里虐殺事件)1919년4월 3·1운동의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일본군이 수촌리 일대를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수촌리는 현재의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로, 당시 일본군에 의해 42호중 38호가 불에 탔다. 마을 전체가 몰살당한 수촌리의 실상이 입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퍼졌으나, 일제는 이 사실을 수긍하지 않았다. 하지만 4월 16일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영국 공사관 커티스, 프리랜서 기자인 테일러가 수촌리를 직접 방문함으로써 전 세계에 알려졌다. 4월 18일에는 세브란스병원 의사 스코필드가 다녀갔고 4월 19일에는 영국 영사 로이즈와 수원 지방 교회를 관리하는 노블 감리사를 비롯하여 케이블, 빌링스, 벡크 등 감리교 선교사들이 다녀갔다. 이들을 통해 방화 사건의 진상은 세상에 알려졌고 수촌리는 3·1운동과 관련한 민족 수난의 현장으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을 저지른 일본은 제암리학살사건까지 저지르는 만행을 자행했고,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면 역사속에서 묻혀버릴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