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 개의 출처 구조, 1 개의 링크를 깨진 것으로 표시 #IABot (v2.0beta9)
북한이라는 말은 백:아님#국가에 위배되는 표현이므로 위키백과 내에서는 가급적 직접 인용이나 고유명사의 일부로만 사용합니다.
152번째 줄:
[[파일:Welcome Celebration for Red Army in Pyongyang2.JPG|섬네일|210px|right|1945년 10월 14일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평양시 민중대회에 참석한 고당 조만식 선생. 그 왼편이 [[니콜라이 레베데프|레베데프]] 소장. 고당도 이날 연설을 하였고, 이어 김성주(김일성)가 대중 앞에 처음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서 연설했는데, [[김일성 가짜설|가짜 소동]]이 벌어졌다.]]
 
1945년 가을부터 전국의 지방의 농민연맹지국들이 실시하던 3·7제를 반대했다.<ref name="cha196">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김연철 번역, 서해문집, 2007) 196페이지</ref> [[1945년]] [[9월 21일]] 날짜로 소련은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초를 둔 부르주아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를 내린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08685 (제40회 이승만 포럼) 스탈린 지령문 "북한에 소련체제 이식은 이렇게 하라"] NewDaily 2014.6.24 ; <br/>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22600209206008&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93-02-26&officeId=00020&pageNo=6&printNo=22097&publishType=00020 "북한(北韓)에 부르주아 민주정권(民主政權) 수립" 스탈린, 점령(占領) 소련군(蘇聯軍)에 비밀지령 문서 50년만에 공개] 1993.02.26. 동아일보 6면</ref> 이를 수행하기 위해 민족주의자가 필요했는데, 민족주의자 인사들은 대부분 월남했고 북한지역에는북조선 지역에는 거의 남아있지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민족주의자는 조만식뿐이었다. 조만식은 '나는 노린내 나는 소련군이 싫다.'고 공언할 정도로 배타적인 민족주의자였다. 소련군정은 직접 나서지 못하고 김일성과 최용건을 통해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라고 권유했다.<ref name=autogenerated5>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292</ref> [[9월 27일]]에는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3·7제를 적용했다.<ref name="cha197">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김연철 번역, 서해문집, 2007) 197페이지</ref> 조만식은 항의의 뜻으로 이틀 동안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인민위원회가 자본가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cha197"/>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았고<ref name="신진1"/> [[10월 16일]] ~ [[10월 17일]] [[평양]]의 요리집 가선(歌扇)에서 [[김일성]] 가족을 위한 환영연을 주관하였다.<ref name="신진1"/>
 
소련 정부는 북한에북조선에 독자적인 정권기구를 수립하려는 소련군정의 구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정의 계획이 아무런 반대 없이 곧바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조만식은 소련군정의 구상에 분명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11월15일 김일성과 한 대담에서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을 포함하는 중앙정부의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만식은 이러한 정부의 수립에 참여하기 위한 자신의 서울 방문 계획을 김일성과 협의했다.<ref name="cho0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11/10/200511100500001/200511100500001_3.html 소련의 북조선 독자정권 구상과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반발] 신동아</ref>
 
김일성은 “인민의 참여에 기초해서 밑으로부터 정권기관을 수립해 나가고 나중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답변했지만, 조만식은 “12월1일 이전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서 외국군대의 철수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김일성이 점령군의 철수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ref name="cho01"/> 조만식의 남한 방문은 소련 군정의 거부와 감시로 무산되었다.
169번째 줄:
[[조선민주당]]은 곧 면단위 지구당을 만들었으며 [[11월]]의 지방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ref name="cha198"/> 조선민주당은 창당 수개월 만에 50만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ref name="이재호1">[http://www.donga.com/fbin/output?n=200509030038 민노당은 조만식 선생을 기억하는가] [[동아일보]] 2005년 09월 03일자</ref><ref>일제강점기 당시만해도 평양을 비롯해서 북조선 지역은 개신교계열이 지지기반이 매우 강했고, 평양은 '조선이 예루살렘'이라 불릴정도였다. 때문에 소련이나 김일성은 대중들로부터 지지가 높았던 조만식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ref> 당원 대부분은 조만식의 인품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순수한 염원을 보고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다.<ref name="이재호1"/> 조만식의 지지기반은 그가 세운 [[조선민주당]]의 지지자였던 개신교세력과 [[부르조아|자산계급]]이었다.<ref name="cha11">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김연철 번역, 서해문집, 2007) 97페이지</ref> 특히 [[평안남도]]에서 압도적이었던 보수적인 [[미국]]식 [[장로교]]도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획득하고 있었다.<ref name="cha195" />
 
조만식과 그의 지지자들은 [[소련]]의 [[북한북조선]] 점령 과정에서 점차 [[공산주의]]자들 및 [[소련]]과 충돌하게 되었다.<ref name="cha11"/> [[소련]]군은 어떻게든 조만식이 친[[소련]]적 입장에 서도록 회유와 압박을 가하였다.<ref name="이재호1"/>
 
==== 신탁통치 반대운동 ====
191번째 줄:
[[1946년]] [[1월 5일]] 이후에도 개신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벌이던 조만식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신탁통치 협정문 안건에 관한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축출된 뒤 조만식은 결국 1월 5일부터 연금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군 소좌로 제25군 특별정치선전공작대인 '제7부'의 부책임자로 있었던 [[레오니드 바신|레오니드 바신(Леонид Васин, 1915~2006)]]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북한주재북조선 주재 [[내무인민위원회]]총책 [[니콜라이 아노힌|아노힌 (Николай Анохин, 1898~1974)]] 소장이 협력을 거부하는 조만식에게 '일제가 항복 직전 그를 석방한 것은 일본 첩자였기 때문'이라는 누명을 씌워 신문과 방송이 이를 보도하게 한 후에 연금했다고 하였다.<ref>
[https://books.google.co.kr/books?id=QwjiBwAAQBAJ&pg=PA50&lpg=PA50&dq=Leonid+Vassin&source=bl&ots=Ktwx0smnXk&sig=3oTTb2KFd9VdHbqcNzcuIAKHq0o&hl=ko&sa=X&ved=0ahUKEwjTnMPh06rLAhUDnJQKHbE6D8gQ6AEILTAD#v=onepage&q=Leonid%20Vassin&f=false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0</ref><ref>[http://dlps.nanet.go.kr/SearchDetailView.do?cn=KINX1992032339&sysid=nhn 「날조된 英雄(영웅)」金日成(김일성) / 바신, 레오니드] 新東亞(신동아) 398호 (1992.11) pp.486-501</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620516 曺晩植(조만식) 제거 - 金日成(김일성) 등장 증언요지 (1)] 연합뉴스 1992-10-01<br>[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619994 曺晩植(조만식) 제거 - 金日成(김일성) 등장 증언요지 (2)] 연합뉴스 1992-10-01<br>[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619169 曺晩植(조만식) 제거 - 金日成(김일성) 등장 증언요지 (3) <完(완)>] 연합뉴스 1992-10-01</ref> 미군이 기록한 1948년 5월 남북협상차 방북후 귀환한 "김구, 김규식이 발표한 공동성명(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ref name="joint">[http://db.history.go.kr/id/ps_002_1350 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김구와 김규식의 공동성명)] 문서번호 501.BB-Korea/5-648, 발신 JACOBS, 수신 국무장관, 날짜 1948-05-06.</ref>에도 "양인 모두 조만식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를 친일 반역자로 낙인찍어 재판에 회부할 서류들을 마련중으로 보였다 (Both reported that they did not see Cho Man Sick, against whom dossier is apparently being compiled, for possible trial, as died in wool pro-Japanese traitor.)"고 하였다.
 
북한은북조선은 내외 방문객들에게 조만식이 고급호텔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명백한 연금이었다. 조만식이 물러난 조선민주당 위원장에는 빨치산파 [[최용건]]이, 부위원장에는 [[홍기주]]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쥠으로써 반탁운동의 중심이던 조선민주당은 찬탁의 거점으로 돌아서게 되었다.<ref>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311</ref>
 
==== 정계 축출 이후 ====
201번째 줄:
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쟁]]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1월 23일]] [[김일성]]은 조만식을 반동으로 규탄하고 조선민주당을 접수, [[2월 24일]] [[최용건]]을 [[북조선민주당]] 당수로 임명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3 /> 한편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에서 강제 축출되자 [[최용건]]은 '조만식이 [[일본]]인의 신민이 되는 것을 칭찬하고, 격려한 [[사이비]] [[민족주의]]자라고 격렬하게 성토했다.<ref name="cha11"/><ref>평양민보 1946년 4월 1일자</ref>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조만식은 [[김구]], [[김규식 (1881년)|김규식]], [[이승만]],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ref name="비상362">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서중석, 역사비평사, 2006) 362페이지</ref> [[미군정]]청의 [[브라운]] 소장이 방문하자, 그는 자신을 방문한 미군정청의 브라운에게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소." 라며 월남권유를 거절하였다.
 
[[1946년]] [[2월 9일]]부터 [[2월 11일]]까지 북한을북조선을 방문한 [[여운형]]과 신탁통치 관련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ref name=autogenerated2 /><ref name="신진2">신진보연대, 신진보리포트 2007년 봄호 (신진보연대, 2007) 135페이지</ref> 북한의북조선의 저명 인사들은 조만식에게 월남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ref name="이재호1"/>
 
[[이승만]]과 [[김구]]는 [[1946년]] [[4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 /><ref name="신진2"/>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ref name="신진2"/> 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ref name=autogenerated2 />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 (1890년)|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 이윤영은 ‘이승만과 김구에게만 이 문서를 보여준다’는 조건하에 서명하였지만 결국 문서가 공개되자 월남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 /><ref name="신진3">신진보연대, 신진보리포트 2007년 봄호 (신진보연대, 2007) 136페이지</ref> [[조선민주당]]은 당수인 조만식이 연금상태에 있던 상황에서 부당수인 [[이윤영 (1890년)|이윤영]]마저 월남하자 다른 부당수였던 [[최용건]]에 의해 장악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2 />
 
[[1946년]] [[5월]] 남한과 북한의북조선의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시되자 그는 밀사를 보내 후처 [[전선애]]를 불렀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여 머리카락을 삭발해 두었다가 면회시간에 [[전선애]]에게 자신의 머리카락과 자른 일시를 적은 쪽지를 담은 흰 편지봉투를 [[전선애]]에게 건내주었다.<ref name="장로3"/>
 
조만식은 아내 [[전선애]]에게 호텔에 놓여 있던 피아노로 찬송가를 연주하게 하였고 그 사이 세 자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기도한뒤 작별인사를 나누었다.<ref name="장로3"/><ref name="완벽1"/>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여기서 눈뜬 장님을 만드는 것보다 위험이 따르겠지만 자녀들을 서울로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는게 좋겠다며 아내에게 월남을 권고했고, 가족과 작별한 뒤 [[전선애]]는 조만식이 건네준 머리카락을 품에 간직하고 세 자녀와 함께 월남하였다.<ref name="한겨레1">[http://hanireporter.co.kr/section-005080000/2000/005080000200003292335444.html (부음) 조만식 부인 별세외] 한겨레 2000년03월29일자{{깨진 링크}}</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205860 (부음) 고당 조만식선생의 부인 전선애여사 타계] 한국경제 2000년 2000-03-29일자</ref> [[10월]] 남한 [[미군정]]의 경제고문 [[번스]](Authur C. Bunce)는 [[평양]] 방문기간 중 조만식을 만났다.<ref name="bun">[http://archive.history.go.kr/id/AUS179_01_04C0011_061 Report of the Visit of Arthur C. Bunce with Chancellor Balasanov in Pyongyang]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국사편찬위원화 전자사료관(The Archives of Korean History)</ref><ref name="cha199" /> 번스를 초청한 소련군의 경제고문인 1등 서기관 [[발라사노프]](Valasanov)는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지지하지 않는 반동이라고 번스에게 말했다.<ref name="bun"/><ref name="cha199"/> 번스에 의하면 당시 '조만식은 비교적 건강한 정신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우리를 떠나보내기를 주저했다.<ref name="bun"/><ref name="cha199"/>'고 진술했다.
213번째 줄:
해방 초기에도 [[여운형]]· [[김규식 (1881년)|김규식]] 등으로부터 남한으로 내려오라는 권유가 있었으며<ref name=autogenerated1 /> 김일성 세력과 마찰을 빚던 즈음부터는 [[남한]]의 반공 우익 세력들과 [[미군정]],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반탁 운동의 기수로 신망이 높은 그를 월남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조만식은 북녘의 동포들을 버리고 혼자 내려갈수 없다며 월남을 거부했다.
 
=====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정부 수립 이후 =====
[[파일:1950년 6월 17일 동아일보.jpg|썸네일|350px|right|[[1950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 조만식<->[[김삼룡]],[[이주하]] 맞교환 제의를 다룬 기사.]]
1948년 5월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112페이지</ref>
 
1950년 6월 10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보름 전에 [[북한북조선]]에서는 전형적인 화전양면기만술의 일환으로 [[김삼룡 (1908년)|김삼룡]] 및 [[이주하]]를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며교환하자고 주장하며, 6월 23일을 협상기일로 제안했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5. 高浪浦 -汶山-奉日川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93쪽. <!-- 한편 이무렵 政治的으로는 南勞黨의 李舟河, 金三龍 등과 그들이 監禁중인 曺晩植을 交換하기 위한 南北協商에서 6월 23일을 一方的으로 定해 놓고 기실 交換日字인 6월 23일을 期하여 당면의 2개사단을 大部隊 機動훈련으로 假裝하여 南侵 集結地인 38˚線上에 移動시켰던 것이다. --></ref> 이는 북한북조선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북한은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 [[강준만]] |제목=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쪽=54 |인용문=<!-- 6월 10일 북한은북조선은 김삼룡과 이주하를 고당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북한북조선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북한은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이 되풀이되었다…. 나) …나) 정창현, 『인물로 본 북한현대사』(민연, 2002), 120쪽.--> }}</ref><ref>사실, 이승만은 조만식이 남한에 내려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조만식을 삼팔선 이남까지 데리고 내려오라.'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교환을 거부했다.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514</ref>
 
=== 죽음 ===
[[1950년]] [[5월 16일]] 북한북조선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1908년)|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이승만]]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5일]] 조만식은 북한북조선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박명림
|제목=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230번째 줄:
|장=
|페이지=
|인용문=}}</ref> 정황은 비슷하나 총살된 날짜가 [[10월 18일]]이라는 설도 있다([[박길룡]] 증언). [[소련]] 출신으로 김일성의 통역과 북한북조선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다가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갔던 [[박길룡]] 등의 증언에 의하면 조만식은 [[1950년]] [[10월 18일]] 퇴각 중이던 북한북조선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되었다고 한다.<ref name=autogenerated1 /><ref name="cha200">찰스 암스트롱, 북조선 탄생 (김연철 번역, 서해문집, 2007) 200페이지</ref> 그러나 [[중공군]]과 함께 [[북한북조선]] 당국이 다시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의 죽음은 유엔군 및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주장된 바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