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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무습은 [[막복원]]의 아들로, [[1563년]] [[2월]]에 태어났다.
 
[[1564년]], 막복원이 홍역으로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 막무습이 매우 어렸으므로 겸태왕(謙太王) 막경전(莫敬典)이 군사의 일을 주관하였고, 응왕(應王) 막돈양(莫敦讓)이 내정을 주관했다. 부마(駙馬)인 안군공(安郡公) 막옥련(莫玉輦), 석군공(石郡公) 완경(阮敬) 등과 같은 대신들이 보정대신이 되어 병권을 잡고 막무습을 보좌했다. 당시 [[후려조]]의 태사(太師) [[정검]]은 여러 차례 막조를 쳐서 승리하여 많은 땅을 탈취했는데, 막조의 보정대신 사이엔 오히려 분쟁이 발생해 서로를 고발했다. [[1564년]],같은 해에 막경전의 장자인 단웅왕(端雄王) 막경지(莫敬止)가 막경전의 첩과 사통했다고 고발당하자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 막경전의 둘째 아들 막경부(莫敬敷)를 당안왕(唐安王)에 봉하고 병권을 위임했다. 막경전이 죽자 막경지는 바로 웅례공(雄禮公)에 봉해졌지만 병권은 가지지 못했다.
 
후려조의 정검이 막조의 산남(山南) 일대를 여러차례 공격했고, 지나는 곳마다 승리했다. 정검이 계속 공격해오자 막조의 조정에서는 이를 어떻게 퇴각시킬지 논의하였다. 겸태왕 막경전이 다른 의견들을 물리쳤고, 후려조 군사의 주력이 전부 막조를 치기 위해 밖으로 나왔으니 후려조의 수도인 청화(淸化)는 반드시 비어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1565년]], 막경전이 군사를 이끌고 청화를 기습 공격하여 후려조의 군사를 대패시켰고, 정검을 압박해 군사를 물리게 했다. 그러나 [[1568년]]부터 정검이 다시 공격해오자 막조는 수세에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