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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중 죽기 전에 지었다는 시조(詩調)인 〈춘산곡〉(春山曲)이 전한다. 부인 홍양 이씨는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다 절벽으로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아들 '김광옥'은 [[전라북도]] [[익산군]] [[용안면]]에 숨어살며 [[본관]](本貫)을 [[용안면|용안]](龍安)으로 바꾸고 신분을 감추며 살았다. 그 뒤 '김광옥'은 외삼촌인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로 이주하여 후손을 이어간다.
 
[[1661년]](현종 2)에 억울함이 밝혀져서 신원(伸寃)되고 관작을 복관해 주었다. [[1668년]](현종 9) [[참의|병조참의]]에 추증하였다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고, [[1680년]](숙종 6) 장군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을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사액하였다.
 
[[1785년]](정조 9)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공(忠壯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1788년]](정조 12)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증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1789년]](정조 13) 자급(資級)을 [[좌찬성|의정부 좌찬성]] 종1품으로종1품에 추증하고, 부조(不逝)를 명(命)하였다. 또 장군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고, 장군이 태어난 마을 이름도 생계(牲繫)에서 오두(烏頭)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 〈춘산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