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량 (동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0번째 줄:
[[소준의 난]] 토벌 이후 반란이 일어난 책임을 지고 중서령을 사직했으며, 후임에 동생 유빙(庾冰)을 천거한 뒤 스스로 평서장군(平西將軍) · 예주자사(豫州刺使)를 맡아 무호(蕪湖)에 주둔하며 북방의 방어에 전념하였다. 이후 334년 도간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역임해 서부군단(西府軍團)을 지휘했으며, 북부군단(北府軍團)을 통솔하던 [[치감]](郗鑒)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조정에서 왕도를 몰아내자고 하였으나 치감이 반대하여 거병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 뒤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이 사망하자 주둔지를 양양(襄陽)으로 옮겨 북벌을 꾀하였으나, 339년 북벌의 거점 역할을 하던 주성(邾城)이 후조의 [[석호]](石虎)에 의해 함락되면서 무산되었고 유량은 이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를 안서장군(安西將軍)으로 강등시켰다. 같은 해 왕도가 사망하자 조정에서 유량을 [[사도 (관직)|사도]](司徒) · 양주자사(揚州刺史) ·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임명해 수도로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유량은 이를 사양하였고, 이듬 해인 340년 사망하였다. 사후 [[태위]](太尉)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공(文康公)이다. 서부군단은 동생인 유익이 물려받았으며, 345년 유익 사망 이후 [[환온]](桓溫)이 이를 계승하였다.
 
{{토막글|중국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