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제도혜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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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고제 6년([[기원전 201년]]), 작년에 [[초 (전한)|초]][[왕 (작위)|왕]]으로 이봉된 [[한신 (회음후)|한신]]을 대신하여 [[제왕 (제나라)|제왕]]에 봉해졌고, [[교동군 (중국)|교동]]·[[고밀군|교서]]·[[제군|임치]]·[[제북군|제북]]·[[제남군|박양]]·[[성양군|성양]] 6군 73현을 통치했다. 평양후평양[[열후|후]](平陽侯) [[조참]]을 [[상국]]으로, 양릉후(陽陵侯) [[부관 (전한)|부관]]을 [[승상|우승상]]으로 두었다.
 
고제 11년([[기원전 196년]]),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제를 따라 종군하였다.
 
이듬해, 고제가 붕어하고 이복동생 [[전한 혜제|혜제]]가 즉위하였다. 고제의 총애가 두터웠던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가 혜제와 함께 황태자 자리를 놓고 다툰 이래로, 혜제의 생모인 [[고황후|여태후]]는 종실에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유비의 모친 조씨는 근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한미한 자였으나, 유비는 고조의고제의 장자였기 때문에 여태후는 이를 불안히 여겼다.
 
혜제 2년([[기원전 193년]]), 유비는 [[장안]]의 궁궐에서 의식을 치르고 혜제와 여태후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이때 혜제는 이번 연회에서는 허물없이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하였고, 이에 고제의 장자인 유비가 상석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여태후는 이를 불쾌히 여겼고, 유비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독이 든 술을 마실 뻔하였으나 혜제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훗날 이 사실을 안 유비는 신하의 조언을 따라, 자신의 영지 중 [[성양군]]을 [[노원공주]]에게 주어 여태후의 환심을 샀다.
 
혜제 6년([[기원전 189년]]), 숨을 거두었다. 시호를 [[도 (시호)|도]][[혜 (시호)|혜]](悼惠)라 하였다.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