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르 하우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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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piegelschriftzettel von Kaspar Hauser.jpg|섬네일|left|카스파르 하우저를 불러내는데 쓴 문제의 편지]]
 
5일 후, 1833년 12월 14일에 하우저는 왼쪽 가슴에 깊은 상처가 난 채로 집에 돌아왔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안스바흐의 왕궁 정원<ref group="주">[[독일어]]로는 호프가르텐(Hofgarten)이라고 한다.</ref>으로 유인했고 그 낯선 사람이 자신에게 가방을 주는 동안에 자신을 칼로 찔렀다고 말했다. 경찰관 헤를린이 왕궁 정원을 수색했을 때 그는 연필로 쓴 '거울 쓰기' 방식<ref group="주">좌우 반대로 작성하는 법을 말한다.</ref>의 메모가 든 보라색 지갑을 찾아냈다. 메시지는 독일어로 "하우저는 여러분들에게 꽤 정확하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우저의 노력을 덜어주기 위해 내가 직접 스스로 어디에서 왔는지 말하고 싶다. 나는 바이에른 왕국 국경 근처 강에서 왔다. 난 심지어 내 이름도 말할 수 있다. M. L. Ö."라고 적혀 있었다. 카스파르 하우저는 그 부상으로 인해 1833년 12월 17일에 죽었다.
 
하우저의 설명에 모순된 점은 그가 스스로 자신을 찌르고 누군가에게 공격당했다고 이야기를 꾸민 것으로 의심된다는 안스바흐 법원의 조사를 이끌었다. 왕궁 정원에서 발견된 그 지갑 안에 든 메모는 철자 오류 하나와 문법적 오류 하나가 있었는데 둘 다 하우저의 공통된 특징이었고 그의 임종 즘에 "연필로 쓴 것"에 대해 두서 없이 불평을 계속했다. 비록 그는 그 지갑이 발견되기를 학수고대했지만 정작 그것의 내용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메모는 특이한 삼각형 형태로 접혀 있었는데 마이어 여사의 말에 따르면 하우저가 편지를 접는 방식이 그러했다고 한다. 법의학자들도 그 부상은 확실히 [[자해]]일 것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많은 작가들은<ref>A. Lang, Striedinger, Leonhard, Mistler, Trautz, Schreibmüller, and others</ref> 그가 자신의 이야기에 대중적 관심이 되살아나기 위한 노력으로 자해를 한 것이며 스탠호프가 자신을 영국으로 데려가겠고 한 약속을 이행하도록 설득하려고 했으나 계획했던 것보다 더 깊숙이 찔렀던 것으로 믿는다.<ref>For a detailed discussion of the evidence, see: Walther Schreibmüller: ''Bilanz einer 150jährigen Kaspar Hauser-Forschung'', in: Genealogisches Jahrbuch 31, 1991, pp.&nbsp;43–84, here pp.&nbsp;63–8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