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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뢰관'''({{zh-stp|s=虎牢关|t=虎牢關}}) 또는 '''사수관'''({{zh-stp|s=汜水关|t=汜水關}})은 [[중국]]의 옛 관문이며, 중국 [[허난 성]] [[싱양 시]] 북서쪽으로 약 16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다. 여러역대 왕조 대대로 [[낙양]](洛陽) 동부를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으며, [[서주]](西周)의 [[주 목왕|목왕]](穆王)이 이곳에 [[호랑이]]를 가두고 기른 것으로 인해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 남쪽으로는 [[숭산 (산)|숭산]], 북쪽으로는 [[황하]]와 접해있으며, 여러 산들이 겹쳐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
 
== 역사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의하면 기원전 673년에 [[주나라]](周) [[주 혜왕|혜왕]](惠王)이 [[정나라]](鄭) [[정 여공|여공]](厲公)에게 과거 [[정 무공|무공]](武公)이 다스리던 호뢰(虎牢) 동쪽을 주었다고 하며, 100여년 뒤인 기원전 571년 [[노나라]](魯)의 [[맹헌자]](孟獻子)가 호뢰에 성을 쌓아 정나라를 견제하자는 제안을 [[노 양공 (25대)|양공]](襄公)이 받아들여 그 해 겨울 건설되었다건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정백극단우언(鄭伯克段于鄢)에 의하면 [[무강 (정나라)|무강]](武姜)이 [[공숙단]](共叔段)을 위해 [[정 장공|장공]](莊公)에게 '제(制)' 지역을 하사해주기를 요청했다가 험준한 지세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는데, '제' 지역이 호뢰이다.
 
이후 이곳에서 수많은 전쟁이 발생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서기 [[190년]], [[후한]](後漢)의 조정을 장악한 권신 [[동탁]](董卓)을 제거하기 위해 결성된 [[반동탁 연합군]]이 처음으로 동탁의 군대와 싸운 곳으로 알려져등장하며, 있다.[[관우]](關羽)가 연의에서는[[화웅]](華雄)의 목을 벤 [[동탁 토벌전#사수관 전투|사수관 전투]]와 [[유비]](汜水關劉備) 싸움과· 호뢰관[[관우]](虎牢) 싸움으로· 나뉘는데,[[장비]](張飛) 사실삼형제가 [[여포]](呂布)를 퇴각시킨 싸움에서[[동탁 나타난토벌전#호뢰관 지명은전투|호뢰관 같은전투]]가 곳이며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는 연의의 창작으로, 후한실제로 때에는화웅의 호뢰관목을 벤 것은 [[손견]](孫堅)이다. 또한 전투가 발생한 지역도 호뢰관이 아닌 양인에서 발생한 [[양인 전투]]이며, 당나라사수관과 때부터는호뢰관은 사수관이라동일한 불렸다지역이다.
 
또한 이 당시에는 관문이 아닌 요새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성이 건설되어 관문으로 이용되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신당서]]》에 등장한다. 그리고 [[수말당초]](隋末唐初) 시기에 [[당나라]](唐)의 [[당 태종|이세민]](李世民)이 [[왕세충]](王世充)과 [[두건덕]](竇建德)을 토벌한 [[호뢰 전투]]가 발생하였으며, 당나라의 초대 황제인 [[당 고조|이연]](李淵)의 할아버지인 [[이호 (서위)|이호]](李虎)의 휘(諱)인 '호'와 호뢰관의 '호'의 글자가 같아, [[피휘]]를 위해 호뢰관을 '''무뢰관'''({{zh-stp|s=武牢关|t=武牢関}})으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사수관에 [[당나라|당대]]까지 성이 지어지지 않았다는 점, 유비·관우·장비가 당시에는 [[황건적]]을 토벌하고 있었다는 정사의 기록이 연의와 배치된다.
 
{{토막글|삼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