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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조선 정종|정종]]을 꼭두각시로 세웠다가 곧 왕권을 양위받은 태조의 아들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은 특권층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 사병들을 강제 해산, 조선군에 편입하고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왕권을 대폭 강화하였고, 정도전을 암살한 뒤 관료 제도를 재상 중심 [[의정부서사제]]에서 임금 중심인 [[육조직계제]]로 개편하였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궁내에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장영실]]을 등용하여 아들 [[조선 문종|문종]]과 함께 [[과학]] 발전에도 힘썼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등 애민정치를 펼쳤다. 조카 [[조선 단종|단종]]을 [[계유정난]]으로 몰아낸 [[조선 세조|세조]]는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을 제거한 뒤 태종처럼 육조직계제를 채택, 왕권을 강화하였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짓기도 했다. 단명한 [[조선 예종|예종]]에 뒤이어 즉위한 [[조선 성종|성종]]은 치국의 근본이 되는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문물 제도를 정비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 등장하고 기존 대신인 훈구와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다. 사림과 훈구를 모두 배척하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한 [[연산군]]을 [[중종반정]]으로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조광조]]를 중용하는 등 사림 공신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조선 인종|인종]]과 [[조선 명종|명종]] 역시 사림과 훈구의 공방 속에서 요절했다. [[조선 선조|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훈구파가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파가 정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사림이 붕당을 형성하여 대립각을 세우면서 조선 정치는정치의 꽃 [[붕당정치]] 접어든다탄생한다.
 
200년 간 평화로이 지내다가 [[16세기]]에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재정이 바닥났으며,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친 [[광해군]]은 [[서인]]이 [[인조반정]]으로 왕좌에서 끌어내렸는데, 그로써 권력을 쥔 [[인조]]는 친명배금을 표방하다가 [[병자호란]]으로 탈탈 털린다. 이 양난을 기점으로 [[유교|유학]]의 영향력이 공고해지고, 조선의 역사는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접어든다. [[삼전도의 굴욕]]을 맛본 조정에서는 청나라에게 당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론]]과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조선 효종|효종]]이 [[의료사고]]로 숨지면서 북벌론이 흐지부지되고, 북학론도 여전히 청나라를 오랑캐로 치부하는 관료들 때문에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이후 권좌에 오른 [[조선 현종|현종]]은 [[경신대기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수습하고 황폐화된 조선을 복구하며 서인을 견제하는 데 힘을 썼다. 이즈음, 붕당 정치는 붕당들이 학문적, 정치적으로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여 스스로 부패하는 것을 경계했던 초기와 달리, [[조선 숙종|숙종]] 때 붕당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환국'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이라는 '붕당 정치의 원칙'이 무너지고, 정권을 잡을 때마다 다른 붕당을 모조리 축출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궐내의 권력 암투였기에 수 차례 환국을 거치는 동안 백성들은 오히려 태평성대를 누렸다. 숙종이 총애하던 [[장희빈]]의 소생 [[조선 경종|경종]]은 [[소론]]과 [[노론]]의 알력다툼에 지쳐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