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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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재건최고회의 ===
{{본문|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공·미국과의 동맹강화·구악일소·경제재건 등을 공약으로 5·16 군사 정변에혁명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정변이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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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정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개편해 만든 통치기구이다.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통치기구였으며 [[1963년]] [[12월 17일]]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 5·16 군사 정변혁명 직후 ===
[[파일:조리돌림.JPG|섬네일|300px|오른쪽|5·16 군사 정변 이후 구악일소(舊惡一消)라는 이유로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 의해 [[조리돌림]] 되는 [[이정재 (1917년)|이정재]] 外 폭력조직]]
 
정변혁명 초기에는 일부 인사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는데 [[장준하]]는 [[사상계]] 6월호에서 "과거의 방종, 무질서, 타성, 편의주의의 낡은 껍질에서 탈피하여, 일체의 구악을 뿌리 뽑고 새로운 민족적 활로를 개척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군사쿠데타를군사혁명을 지지하였고 언론인 [[송건호]]도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초기까지 민족적이라고 평가하여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도 하였다.<ref>송건호 《송건호 전집:20 역사에서 배운다》(한길사, 1996) 295페이지</ref> 또한 정변 한달 뒤, 일제강점기 당시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는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투고의 첫머리에서 '5·16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과 무능을 폭로하며 '한국에는 아직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ref>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73801&sc=naver&kind=menu_code&keys=1</ref>
 
[[박정희]]는 정변혁명 직후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 투옥된 독립운동가 [[김학규 (1900년)|김학규]]를 사면·복권시켰다.<ref name="안동의성1">[http://www.donga.com/fbin/output?exclusive=news&f=nes&n=200408170205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ref> 이후 그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에 지장이 생기자,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에게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을 하였다.<ref name="안동의성1"/> 또한 군정 세력은 취약한 정통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포상이 없었던 점을 지적, [[1962년]] [[3·1절|3월 1일]]과 [[광복절|8월 15일]]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포상을 단행했다.
 
== 평가와 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