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저우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 연혁 ==
 
=== 발해이전 ===
[[한나라]] [[요동군]]의 평곽현이 설치되었는데, 본 현성은 지금의 가이저우 시 도성위에 존재했다.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점령한 뒤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가 고구려가 요동땅을 개척하면서 폐허가 된 평곽현 근교 청석령향(靑石嶺鄕) 고려성자촌의 동쪽 석성산(石城山)에 [[건안성]]을 축조했다.
 
[[고구려-당 전쟁]]초기 당나라의 장수 장량이 [[비사성]]을 격파하고 본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과 함께 당군을 격퇴했던 것으로 보아 [[요동성]]을 필두로 한 요동방어선의 주요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가 세운 괴뢰국인 [[소고구려]]는 본현의 건안성에 수도를 두었다.
 
=== 요, 금, 원 ===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킨 건안성에 건안현(建安縣)을 두고 [[개모성]]의 원주민들을 본현으로 이주시켜 '''진주(辰州)'''를 설치했다. 초기에는 군명을 장평군(長平軍)이라 했으나 후에 봉국군(奉國軍)으로 개명되었고 본주는 동경유수사에 예속되었다. 인구는 2,000호였다.
 
줄 37 ⟶ 40:
|}
[[원나라]]에서는 [[1269년]]([[쿠빌라이 칸]] 지원 6년) 개주로에서 동경의 군으로 격하되었고 웅악현과 탕지현이 건안현에 통폐합되었다. [[1271년]](쿠빌라이 칸 지원 8년), 건안현을 개주의 속현으로 삼았고 결과적으로 [[요양부|요양로]]의 속주가 되었다.
 
=== 명청 ===
[[1371년]]([[명 태조]] [[홍무]] 4년) 개주가 폐지되었으나 [[1372년]](명 태조 홍무 5년) 6월 주가 복구되었다. 1376년 10월 위가 설치되면서 [[요동도사]]의 위중 하나가 되었다. 1385년 4월, 주가 다시 폐지되었다.
 
위 동북에 석성산(石城山), 북쪽에 염장(鹽場)이 있는 평산(平山)과 철장(鐵場), 동쪽에 주필산(駐蹕山)과 이하(泥河)와 석문관(石門關), 서쪽에 빈해(濱海)와 연운도(連雲島)와 서쪽에 염장(鹽場), 서북에는 해운선이 요하로 들어오는 양방구관(樑房口關), 남쪽에 청하(淸河)와 [[1409년]]([[명 성조]] [[영락 (명)|영락]] 7년) 축성된 영녕염성(永寧鹽城), 동남에 필리하(畢裏河), 윗쪽에는 관문이 있었다. <ref>장정옥저, <명사> 제41권 지리지2 요동도사 개주위 [https://zh.wikisource.org/wiki/%E6%98%8E%E5%8F%B2/%E5%8D%B741] </ref>
 
청나라에선.
 
== 행정 구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