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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대교린}}
외교면에서는 [[명나라|명]](明)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썼다. 특히 이성계는 국호를 정하는 일에서도 내부적으로 국호를 정했으나,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령(和寧)과 조선(朝鮮) 중에서 승인을 받았던 일이 있다. 이를 통하여 [[조공]](朝貢)·회사(回賜) 형식을 취한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해졌다.
조선은 [[명나라|명]]에 대한 사대 관계에 있었다. 이는 원나라를 멸망시킨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이다. 종주국,종속국이라는 단어는 현대단어로서 조선의 사서나 명나라의 사서에서는 조선이 명나라를 "종주국"이라고 부른 기록은 없다. 하지만 원나라 시절 독립국이였던 고려는 30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에서 타협하여 부마국이 되었고 [[고려]]말에 고려의 명에 따라 명나라를 공격하러 갔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나서 명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명나라|명]]에 형식적으로 제후국의 예를 취했으나 이는 완전히 형식적인 것으로 실제론 조선은
명나라에 진하사, 문안사, 동지사 등을 파견했고 [[조선 태종|태종]] 때부터 [[조선 선조|선조]] 때까지는 종계변무사를 파견했다. 조선 개국 초기, 고려의 명에 따라 명나라를 정벌하러간 것이 이성계 장군이란 것과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강행하려 했던 문제로 [[명나라]]는 이성계를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의 국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국왕 책봉고명사신이 도착하면 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 혹은 [[권지고려국사|권지조선국사]]라고 불렀다. 조성의 왕을 [[조선의 역대 국왕|조선 국왕]]이라고 부른 것은 [[1401년]](태종 1년) [[조선 태종|태종]] 때였다.
또 다른 주변 국가인 [[일본]]과 [[여진족|여진]]에게는 교린 정책(交鄰政策)을 취했다.
==== 제도의 정비와 문화 융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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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신진 사림세력들이 빈번히 화(사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조선 선조|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사림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 사림들 간 자기 일파(일당 전제화)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대립하니, 이를 [[당쟁]]이라 한다. 이렇게 되자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지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으로 변질 되는 등 심한 폐단을 나타내었다.
이어 16세기~17세기에 주변국인 일본, 청과 치른 전쟁(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 정치 구도의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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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 ==
법을 관장하고 죄인을 심문, 형벌을 구형하는 기관은 [[형조]]였고, 죄인을 체포, 추국하는 곳은 [[의금부]]였으나 죄인을 수사, 국문하는 기능은 형조, 의금부 모두 갖고 있었다. 그밖에 현대 한국의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한성부]]에서도 체포, 수사의 기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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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조선의 대외 관계}}
또한 조선은 만주의 여진족을 정벌하였고 조선은 여진족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고 조선에 조공하도록 여진족에 강요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이 [[후금]](청)을 세워 중국을 지배하자 조선에서는 한때 [[병자호란]]의 원한을 갚자는 북벌론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조선 효종|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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