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Kuresda (토론 | 기여)
3번째 줄:
'''조공'''(朝貢)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예물을 바치는 행위를 말하며 유럽에서는 로마 제국이나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영토에 공작이나 선제후들을 임명하고 제국에 대한 의무로서 세금이나 공물을 바치는 봉건적인 시스템이다.
 
동아시아의 경우는 유럽과 달리 특수한데 중국의 주나라때부터 신하들에게 영토를 내리고 그에 대한 공물을 받는 것으로 봉건 제도로서 시작되었으나 중국의 중앙 집권화가 시작되고 영토안의 제후들이 사라지면서 중국 영토밖의 독립적인 외국들이 중국과 교역할때교역할 때 형식적으로 사용된 교역 문화이다.
 
== 개요 ==
주나라때부터 주나라는 친척들이나 공을 세운 신하들을 각 영토에 보내서 신하로 삼고 조공을 하게 하였다.
 
시간이 지나고 중국의 영토안에서만이 행해진게 아니라 밖의중국밖의 중국 한족들과는 다른 독립적인 이민족들이나 외국들과 교역을 할 때도 중국 왕조가 요구하며 행한 시스템이다.이는 서양 열강들이 중국 왕조와 교역을 원할때도 서양 열강들에게 요구한 제도이다.
조공을 행하는 나라는 상대국에 대해 공물을 바치고 조공을 받는 나라는 독립적이며 영향력을 줄수 없는 국가들의 왕에게 형식적으로 신하로서 책봉을 하면서 공물의 몇 배에서 몇십 배가 되는 공물을 하사하였다. 경제적으로 보아 조공은 하는 쪽보다 받는 쪽이 더 불리한 교역 형태였다.
 
이는 서양 열강들이 중국 왕조와 교역을 원할때도 중국이 서양 열강들에게도 요구한 제도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견당사]](遣唐使)는 「중국과의 대등한 무역을 하고자 한다」고 했고 이에 대해 중국측은 「먼 나라에서까지 해마다 조공할 의무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는 이러한 교역 시스템으로서의 조공은 경제적 이득 뿐 아니라 서적 구입, 정보 수집 등 사회・문화적 이익도 함께 따랐다.
 
조공을 행하는 나라는 상대국에 대해 공물을 바치고, 조공을 받는 나라는나라들은 독립적이며다른 영향력을외국의 줄수왕들에게 없는형식적으로만 국가들의 왕에게 형식적으로 신하로서제후국의 책봉을 하면서주면서 받은 공물의 몇 배에서 몇십 배가 되는 공물을 하사하였다. 경제적으로 보아 조공은 하는 쪽보다 조공을 받는 쪽이 더 불리한 교역 형태였다.
다른 독립적인 이민족들이나 국가들은 중국 문화를 배우면서 중국이 주나라때부터 중국 영토안에서 실시한 이런 조공,책봉 형태의 교역 제도를 중국 왕조와 교역하기 위해 채택하였고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이러한 제도에 자존심의 문제가 일어나거나 국력에 대한 자신감을 내세우기 위해 이러한 중국의 조공
 
제도를 거부하였고 이러한 민족들은 스스로 북조를 세우고 중국 한족 왕조들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견당사]](遣唐使)는 「중국과의 대등한중국과 무역을 하고자하기 위해 한다」고조공을 했고 이에 대해 중국측은 「먼 나라에서까지 해마다 조공할 의무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자 문화권]]에 포함되는 이러한 교역 시스템으로서의 조공은 경제적 이득 뿐 아니라 서적 구입, 정보 수집 등 사회・문화적 이익도 함께 따랐다.
 
다른 독립적인 이민족들이나 국가들은 중국 문화를 배우면서 중국이 주나라때부터 중국 영토안에서 실시한 이런 조공,책봉 형태의 교역 제도를 중국 왕조와 무역,교역하기 위해 채택하였고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이러한 제도에 자존심의 문제가 일어나거나 국력에 대한 자신감을 내세우기 위해 이러한 중국의중국과의 조공무역을 위한 조공제도를 거부하였고 이러한 민족들은 스스로 국가를 세우고 중국 한족 왕조들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송나라]] 시대에는 이러한 양상이 반대로 행해졌다.거란족들은 중국과 교역하며 조공 제도를 이용했으나 세력이 커지자 [[요나라|요]](遼)를 세우고 나서는 송나라에 대등한 위치에서 교역을 원하였고 북조 왕조인 [[금나라|금]](金)나라는 송나라와 계속 전쟁을 하여 송나라가 책봉국 쪽에서 조공을 바치는 형태가 되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원]](元) 왕조에서는 결국 송나라를 정복하였다.
정복하였다.
 
명나라때는 잠시 외국들과 조공 무역이 행하여 졌지만 시행하지 않았던 시기도 있다.
 
[[청나라|청]](清) 왕조에서도 그 동안 외국들과 교역했던 것처럼 유럽 국가와의 교역을 기존의 조공 책봉의 중화 사상 제도로 무역했지만, 그 결과 유럽 국가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아편전쟁]]의 불씨를 제공하였고, 중국은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가 되고 만다.
 
조공과 화사에 대한 내용은 국가마다 기록한 내용이 완전히 다르며 자존심을 위해 실제 없었던 외국의 조공기록을 꾸며내기도 한다. 돌궐, 오이라 같은 중국 왕조에 군사적으로 실질적인 위험을 가하거나 가할수 있었던 국가들은 화사의 양이 조공보다 더 많았다.
 
 
줄 32 ⟶ 33:
{{참고|사대교린}}
 
[[한국]] 왕조들은 중국 영토밖의 독립적 왕조이지만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 이런한 시스템을 사용하였고 중국 왕조와의 분쟁을 막고 실리 목적으로 조공을 했지만, 중국 왕조들이 수탈하는 경우도 있었다했다.
 
고려의 경우에는 중국 왕조와 교역하기 위해 이런 중화 사상 제도를 채택했지만 독립 국가로서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내왕외세를나라안에서는 "황제"를 칭하는 내왕외제를 행하였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북조를 세운 다른 민족들과이민족들과 같이 천자를 자칭하고 다른 국가들에 조공을 받았다.
 
일부 조공품에는 해당 하는 사례를 한경우도 있었다 명사 조선전 내용을 살펴보면 공마 3천필이 요동에 도착하자 15,000필의 견포 즉 비단과 포목을 하사하여 값을 치루어 주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jo_023r_0010_0010_0260 ] 심지어 해당 기록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말값 15,000필의 비단과 포목은 언급이 없다고 하지만 명실록에는 나와있다고 주석까지 달려있다.</ref> 또한 1393년 명사 조선전의 기록을 보면 공마 9,800필을 조선측에서 진상하자 명측에서 1만 9,700필의 모시와 면포를 주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때에는 조선이 조공을 거부하기도 하였다.명나라가 멸망하고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인정하지 못하였기때문이다.
 
다만또한 한국의 왕조도 주변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은 경우가 다수 확인된다. [[삼국 시대]]에 고구려에게 복속해 있었던 [[말갈]],[[거란]],중국 왕조인 [[북연]]등등이 고구려에 조공을 하였고 발해 또한 [[말갈]]제부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고려]]는 [[여진]], [[탐라]]에게 조공을 받았고, [[조선]]도 여진이나 [[류큐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드물게 일본의 조공을 받은 기록이 있으나, 이는 중앙정부 차원의 그것은 아니었다.
 
=== 일본 ===
줄 51 ⟶ 52:
==== 중세 시대 ====
{{참고|일본 국왕|명일무역|가네요시 친왕}}
[[무로마치 막부]] 제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나라와 [[명일무역]]을 개시하여 [[일본 국왕]]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조선과도 무역을 하였다. 일본의 대마도가 조선에 의해 정벌되고 대마도 군주가 조선에 조공을 바쳤다.
 
==== 근세 시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