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 (야구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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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의 개념조차 없던시기인데 다른 선수들 소개에는 전혀 없는 선발승이란 개념을 괄호속에 넣으며 굳이 당선수의 기록을 깍아내리려는 의도가 보여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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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李相潤, [[1960년]] [[12월 21일]] ~ )은 [[KBO 리그]]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였다. 우투우타로,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의 주역으로 베스트 10에 우완 투수로 뽑힌 해태 타이거즈 초창기의 최고 에이스였다.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당시 시속 145km를 넘나드는 강속구에 제구력도 뛰어나 [[선동열]]이 입단하기 전까지 해태의 초대에이스였다. 1983년 해태 타이거즈 첫 우승 당시 20승(13선발승)을20승을 거두고도, [[장명부]](30승)(28선발승)에게 밀려 2위를 하였다(선발승으로 치자면 삼성 [[김시진]]이 14선발승으로 2위)- 전반기의 오버페이스, 후반기의 체력조절도 하나의 이유였다 (14완투). 역대 20승 투수중 다승부분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선수는 이상윤이 유일하다.
 
그 이후로도 3번이나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80년대 초중반 [[김용남 (1958년)|김용남]]과 함께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투수에 올랐고,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특히 1988년 시즌에는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며 16승(13선발승으로 롯데 [[윤학길]]과 공동 선발승 2위를 기록)(선발승 1위는 빙그레 [[한희민]] 14선발승) 6패, 평균자책 2.89를 기록하며 선동렬(16승 5패)(9선발승)과 함께 쌍두마차로 해태의 통합우승및 3연패에 크게 기여했다. 현재는 광주에서 마트사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