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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미군에게 '''[[네이팜탄]]''' 폭격을 당하고 인천으로 가는 길을 터 주었다. '''이 폭격으로 약 120가구 600여 명이 살던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월미도민 100여 명과 월미도에 파견된 육지의 노무자 상당수가 죽었다.'''<ref name=":0" />{{Rp|220-245}} 전쟁이 끝나고 피란에서 돌아온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귀향하여 사라진 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휴전 후에 미군부대가 계속 주둔해서, 미군 부대가 물러가자마자 바로 한국군이 들어와 해군 기지를 세워서, 국방부와 인천시가 도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월미도를 사고팔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민들은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려 배상과 귀향을 요구하였고,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가가 월미도민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월미축제, 월미놀이동산, 문화예술의 장, 만남과 교환의 장 그리고, 공연놀이 마당 등으로도등으로 알려지기입소문을 시작한 월미도는 인천! 하면 떠올릴 만큼 유명한 곳으로 자리잡고 있다. 휴일엔 각지에서 수십만인파 명의수십만이 인파가 몰리는 이곳에는몰려와 카페, 회센터 등 조화를 이루며 늘어서 있어횟집에서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구미에 맞는 음식을 골라 즐길 수도 있다. 인천 앞바다 1km 거리에 떠있는 둘레 4km의 월미도는 섬 아닌 섬으로 변모하고 인천시민과 그 주변의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즐긴다. 썰물 때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바닷물을 볼 수 있으며, 주변에는 횟집이 자리하고 있어 서해안의 별미를 맛볼 수 있다. 월미산에 걷기 좋은 둘레길이 조성되고, 한국전통정원, 전통문화체험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이 설립된 데다가, 다양한 놀이동산까지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인천 명소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ref name=":12">{{웹 인용|url=http://korean1.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7585|제목=월미도-대한민국 구석구석 행복여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18-12-07}}</ref><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655690.html|제목=월미도에서 배만 타면 아깝지|날짜=2014-09-17|언어=ko|확인날짜=2018-12-07}}</ref>
 
== 역사 ==
서울-영등포-인천도호부-월미도-영종도-강화도
 
이때 월미도에도 임시 거처로서 1656년([[조선 효종|효종]] 7) [[홍명하]]의 건의로 인천부사 윤부가 비밀리에 월미행궁을 세웠다.<ref>{{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sa_13404021_001|제목=숙종실록|권=46권|장=1708년(숙종 34) 4월 21일 정묘 1번째 기사: 부사용 민치대가 영종도보다 인천에서 방어하면 득책이 될 것이라는 상소를 올리다|인용문=그러나 고(故) 상신(相臣) 홍명하(洪命夏)는 행궁(行宮)214) 을 인천(仁川)과 월미도(月尾島)에 설치하기를 건백(建白)하였습니다.|확인날짜=2018년 12월 9일|날짜=|성=|이름=|출판사=}}</ref><ref name=":17" />{{rp|11-13}} 인천에서 영종도로 바로 가지 않고 월미도에 들러 머물렀다 가는 것은 물때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여겨진다.<ref name=":17" />{{rp|10}} 그러나 다행히도 병자호란 이후 200년 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임금이 월미행궁으로 올 일은 한 번도 없었다. 1695년([[조선 숙종|숙종]] 21)년 행궁이 중건되었고, 북벌론이 수그러들면서 그 기능이 상실되어 조선 말 고종 때 헐어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행궁에는 수직군(守直軍)이 배치되어 관리를 담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처 월미도 주민들로 추측된다.<ref name=":17" />{{Rp|20}}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다른 행궁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작았다.<ref name=":5">{{웹 인용|url=http://park.incheon.go.kr/board/3317/1987124?curPage=1&bbsNo=3317&startDay=&endDay=&searchTy=1&searchVal=%EC%9B%94%EB%AF%B8%ED%96%89%EA%B6%81&cntPerPage=8|제목=월미공원-월미행궁|성=|이름=|날짜=|웹사이트=인천의 공원|출판사=|확인날짜=2018-12-08}}</ref>
 
월미행궁이 언제까지 남아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청나라]]와 관계가 개선되면서 쓰일 일도 언급될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행궁을 설치한 지 불과 12년 만에 그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ref>{{서적 인용|url=http://sjw.history.go.kr/id/SJW-D04090280-01200|제목=승정원일기|성=|이름=|날짜=1678년(숙종 4) 음력 9월 28일|권=266책|출판사=|장=進修堂에 許積 등이 입시하여 江都의 방어, 內三廳의 薦擧, 沈澐의 개정 등에 대해서 논의함|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積曰, 冬月則甲串, 氷澌滿江, 故孝宗朝, 嘗議以仁 川路入紫燕島, 達于江都, 而此旣迂路, 且再乘船, 危矣. 甲串下有德浦, 築得小城於此, 事急則入保其城, 而使 百官軍民, 一齊渡江, 則便近而無難濟之患矣…上曰, 宮城觀勢爲之, 而先築德浦城可也}}</ref> [[영조]] 대에는 방치가 되어 달랑 [[승려]] 한 명이 관리를 했다.<ref>{{서적 인용
월미행궁의 터가 어디였는지는 월미도 동남쪽 설과 서북쪽 산자락 설이 있는데, 동남쪽은 경사가 가팔라 행궁을 지을 만한 평지도 없고, 수직군이 경작할 농토도 마땅히 없고, 무엇보다 영종도로 갈 뱃길이 없으므로 서북쪽 산자락 나루터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ref name=":17" />{{Rp|13-21}} 단, 이를 확증할 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문헌에서 보이는 행궁의 위치는 '영종진의 남쪽 수로 7리', '일본 해군 석탄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ref name=":5" />
 
세월이 흘러 19세기 무렵, 이 행궁이 퇴락하여 터만 남았을 때, 정체모를 이양선이 월미도에 나타나면서부터 월미도의 수난시대는 시작된다막을 올린다.
 
===[[병인양요]] 때 '로즈 섬'으로 소개되다 ===
[[파일:AmiralRoze.jpg|피에르귀스타브 로즈 제독.|대체글alt=피에르귀스타브 로즈 제독|프레임섬네일]]{{참고|병인양요}}1866년 이양선 무리가 월미도와 [[작약도]] 사이 월미해협에 들어와 닻을 내렸다. 바로 [[병인박해]]를 핑계로 조선을 침략하러 온 [[프랑스]] 극동함대였다. 함대의 소형 전투함 데룰레르호에는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을 길잡이로 삼아 극동함대는 9월 23일 월미해협에 정박을 했다. 9월 24일에는 기함 프리모게호만 월미해협에 남고 나머지 함선들이 염하를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는데, 이때 사방에서 몰려온 조선인들이 산등성이에 올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배들을 구경했다고 한다. 거대한 배가 돛도 없이 해류를 역행해 올라가는 광경은 조선인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 그 자체였다. 한강 하구를 찾은 군함들은 25일 양화진까지 들어갔고, 27일에는 서강나루에 이르렀다. 서강나루는 [[삼남]] 지방에서 거둔 세곡이 서해안을 타고 올라와 화물을 내리는 종착지로, 조선의 목구멍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조정은 급하게 의논을 했으나 마땅히 뾰족한 수가 없었고, 적당히 물러가라는 편지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정찰을 마친 프랑스 함대는 복귀하였다. 이후 10월 14일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강화성을 점령하였다. 관청이란 관청에는 죄다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해 갖가지 도서를 약탈한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장군이 승리하자 놀라 철수하였다.<ref name=":0" />{{Rp|24-39}}
 
이때 프랑스 해군은 정찰을 하면서 크고 작은 섬들에 사령관과 장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였다.<ref group="주">단, 한강 하구로 들어가는 길을 탐색하기 전 임시로 정박한 [[입파도]]에는 외제니({{Llang|fr|Eugénie}})라는 프랑스 황후의 이름을 붙였다.</ref> 물론 가장 중요한 섬에는 최고 사령관 [[로즈 제독]]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 섬이 바로 월미도이다.<ref name=":17" />{{Rp|28}} 이후 조선에 찾아오는 모든 서양 제국주의 세력은 월미도를 로즈 섬({{Llang|en|Roze Island}})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 지도는 5년 뒤 미국 함대가 월미도를 찾아올 때 로저스 제독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ref name=":0" />{{Rp|42}}
 
===[[신미양요]] 때 다시 정박지가 되다 ===
[[파일:신미양요 월미도 촌장.png|대체글=로저스 제독이 군함으로 초대한 월미도 촌장. 손에는 그가 선물로 준 맥주가 가득 들려 있다.|왼쪽|프레임|로저스 제독이 군함으로 초대한 월미도 촌장. 손에는 그가 선물로 준 맥주가[[맥주]]가 가득 들려 있다.|섬네일|334x334픽셀]]
{{참고|신미양요}}
이양선은 1871년 월미해협에 다시 나타난다. 바로 1866년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1871년 [[미국]]의 로저스 제독이 전함 5척, 병사 1,230 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것이었다. 이들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만든 항해용 지도를 바탕으로 조선에 접근했지만 그리 정확한 지도는 아니어서 제독은 5월 23일 [[입파도]]에 정박을 하고 휘하의 블레이크 함장에게 탐측대를 꾸려 인천과 강화해협 근해에 안전하게 정박할 곳이 어딘지 찾아보게 했다. 블레이크는 닷새 뒤 5월 28일 돌아와서 월미해협이 정박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보고했다. 이튿날 29일 오전에 출발한 함대는 하루종일 서해를 거슬러 월미도와 작약도 사이 월미해협에 정박했다. 로저스 제독은 철수할 때까지 모든 지휘를 여기에서 내렸다. 강화도에 상륙하여 손돌목 돈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어재연]] 장군의 부대를 학살한 미군은 6월 12일 정박지로 귀환하고, 20일 간 우물쭈물대다가 7월 3일 철수한다. 이후 79년 뒤 미군은 인천상륙작전 때 월미도에 다시 한 번 찾아온다.<ref name=":0" />{{Rp|44-78}}
===[[운요호 사건]] 때 또다시 정박지가 되다 ===
[[파일:Inoue Yoshika.jpg|대체글=이노우에 요시카 사진.|섬네일|388x388픽셀|이노우에 요시카.]]{{참고|운요호 사건}}
해가 네 번 지나고 1875년 9월 19일, 이양선이 월미도 연안에 또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이전에 온 배보다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았고, 딱 한 척밖에 없었다. 바로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이 탄 운요호였다. 이노우에는 20일 월미도 앞바다에 운요호를 정박시키고, 무력 충돌을 유도하기 위해 작은 보트 하나에 직접 타서 [[강화해협]], [[초지진]] 바로 앞으로 갔다. 강화해협에서 적을 막지 못하면 한양까지 그대로 길을 터주게 되므로, 조선군은 이노우에가 탄 보트에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노우에 함장은 월미도로 복귀하고, 이튿날 초지진에 상륙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목적을 달성한 운요호는 28일 당당히 [[나가사키]]로 돌아간다. 이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다.<ref name=":0" />{{Rp|80-96}}
 
===[[임오군란]] 때 일제 외교관의 피난처가 되다<ref name=":0" />{{Rp|98-119}} ===
[[파일:Yoshimoto Hanabusa 01.jpg|왼쪽|섬네일|하나부사 요시모토(요시타다).]]
[[파일:ImoIncident ToyoharaChikanobu (2).jpg|대체글=치카노부 토요하라가 그린 하나부사가 도망치는 모습.|프레임|하나부사가 도망치는 모습. 치카노부 토요하라 作.]]
{{참고|임오군란}}1877년 11월 20일, 일제의 외교관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월미도 서쪽 바다에 상륙한다.<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2&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levelId=sk_008r_0020_0100_0130_0010|제목=왜사일기(倭使日記)|성=|이름=|날짜=1877년(고종 14) 음력 10월 17일|출판사=|장=경기 감사 윤자덕, 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의 선박이 인천부 월미도 후양에 정박하였음을 보고함|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경기 감사(京畿監司) 윤자덕(尹滋悳)의 장계(狀啓).<br>인천 부사(仁川府使) 이남집(李南輯)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이번 달 16일 미시(未時)에 저들의 배가 영종 경내 월미도(月尾島) 뒷 바다에 닻을 내렸으므로 노문(勞問)을 위해 지금 막 배를 타고 나가며, 저들의 배가 있었던 동래부(東萊府)의 통사 박기종(朴琪淙)이 저들 네 명과 함께 종선(從船) 한 척을 타고 본부 제물포(濟物浦)에 와서 정박하여 급수를 하고 떠났습니다.'라고 하였다.}}</ref> 목적은 일본 외교관이 조선에 상주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부산 외에 또 개항할 항구 두 곳을 고르는 것이었다. 조선은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을 개항하기를 바랐고, 일본은 가장 가까운 곳을 개항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하나부사는 인천을 개항시키려고 갖은 애를 썼다. 여러 번<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28&levelId=sk_009r_0020_0060_0030_0010|제목=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성=|이름=|날짜=1879년(고종 16) 음력 5월 4일|출판사=|장=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인천을 개항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계를 예조 판서 심순택에게 보내옴|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ref><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2&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1&levelId=sk_009r_0020_0060_0190_0030|제목=동문휘고(同文彙考)|성=|이름=|날짜=1879년(고종 16) 음력 5월 25일|출판사=|장=일본 대리공사의 수행원 곤도 마스키, 제물포나 월미도를 임시로 개항할 것을 요청하는 서계를 보내옴|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ref><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56&levelId=sk_009r_0020_0070_0060_0020|제목=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성=|이름=|날짜=1879년(고종 16) 6월 14일|출판사=|장=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인천 개항에 관해 과거 회의했던 취지를 송부하며 회답을 요청함|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ref><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58&levelId=sk_009r_0020_0070_0140_0010|제목=동문휘고(同文彙考)|성=|이름=|날짜=1879년(고종 16) 음력 6월 24일|출판사=|장=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예조에서 인천 개항 불가를 통보한 데 대해 반박하는 서계를 보내옴|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ref><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68&levelId=sk_009r_0020_0080_0010_0020|제목=동문휘고(同文彙考)|성=|이름=|날짜=1879년(고종 16) 음력 7월 1일|출판사=|장=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인천 개항을 강하게 주장하는 서계를 다시 보내옴|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ref><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70&levelId=sk_009r_0020_0080_0040_0010|제목=동문휘고(同文彙考)|날짜=1879년(고종 16) 음력 7월 4일|장=일본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인천 개항을 강하게 주장하는 서계를 또다시 보내옴|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ref><ref>{{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wza_11708028_001|제목=고종실록|성=|이름=|날짜=1880년(고종 17) 음력 8월 28일|권=17권|출판사=|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하교하기를,<br>'개항 등에 관한 일을 다시 먼저 말하던가?'<br>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br>'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한 번 사적으로 묻기에 조정의 의견은 전과 다름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습니다.'}}</ref> 문을 두드리고 담판<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247&levelId=sk_010r_0010_0120_0040_0010|제목=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성=|이름=|날짜=1880년(고종 17) 음력 12월 7일|출판사=|장=일본 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인천 개항 교섭 경과를 외무경에게 보고함|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ref><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251&levelId=sk_010r_0020_0010_0050_0010|제목=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성=|이름=|날짜=1881년(고종 18) 음력 1월 8일|출판사=|장=일본 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인천 개항에 대한 담판이 정돈된 모양에 대해 보고함|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인천개항과 관련된 제1회 담판서(談判書)는 공신(公信) 제5호로 진정(進呈)해 두었습니다. 별지 담판서 제2회부터 제4회와 같이 담판하였는데, 인천에 항구를 정하는 것으로는 하였지만 개항의 기한(期限)은 몇 년 후로 늦추자고 하여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이쪽에서는 오는 명치(明治 15년(1882년) 4월을 개항 시기로 하자고 담판하고 있습니다만 작금(昨今)은 저들의 새해에 해당하여 잠시 공식 담판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확정된 회답도 오지 않았습니다.}}</ref><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259&levelId=sk_010r_0020_0010_0160_0020|제목=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성=|이름=|날짜=1881년(고종 18) 음력 1월 22일|출판사=|장=일본 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인천 개항에 대한 담판에 대한 내용을 보고함|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인천개항 일건에 대한 담판은 몇 차례 진행되었지만 똑같은 말뿐이라서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ref>을 벌인 끝에 하나부사는 1881년 [[김홍집]]과 협상을 타결하여, 쌀을 수출하지 않는 조건으로 20개월 뒤인 1882년 9월에 인천을 개항하기로 하였다.<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263&levelId=sk_010r_0020_0010_0190_0020|제목=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성=|이름=|날짜=1881년(고종 18) 음력 1월 30일|출판사=|장=일본 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인천 개항에 대한 담판에 대한 내용을 보고함|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인천개항을 내년 중에 착수하는 것으로 결정했다는 어기(語氣)를 약간 드러냈음은 공신 제13호로 상신하였습니다. 그 후 두 차례 담판을 거쳐 오늘 28일에 별지(인천개항 일건 담판 제6회)의 대의(大意)처럼 올해 2월부터 기산(起算)하여 20개월을 기한으로 내년 9월에 개항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ref> 개항에 성공한 하나부사는 [[민비]]의 친척 오빠이자 조정의 실권을 쥔 [[민겸호]]에게 일본인 장교를 교관 삼아 [[별기군]]을 창설하라는 편지를 보낸다.<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291&levelId=sk_010r_0020_0030_0240_0010|제목=동문휘고(同文彙考)|성=|이름=|날짜=1881년(고종 18) 음력 3월 28일|출판사=|장=일본 변리공사, 호리모토 레이조 육군소위를 훈련에 추천하는 서계를 보냄|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본론만 말씀드립니다. 우리 정부에서 앞서 소총(小銃) 약간 종(種)을 귀 정부에 증정하면서 본 사신이 대략 말씀드리기를, 총기의 고금의 연혁(沿革)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기묘한 기술이 담긴 것으로 한 사람에게 주면 열 사람을 감당할 수 있으니 병세(兵勢)에 있어서도 크게 변화를 준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일찍이 강수관(講修官)에게 알려 귀 정부에서 육군과 해군 군제(軍制)를 확장하고 각종 공업(工業)을 진흥시키고자 하여 교사(敎師)를 필요로 한다고 하는데, 기술자라면 우리 정부에서 천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비록 귀 정부의 하고자 하는 바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요청하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는데, 이웃 나라에서 교사를 초빙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그런 것입니까. 익숙해지는 데에는 선후가 있고 술업(術業)에는 전공이 있으며, 게다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귀 정부에서는 이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병사를 훈련시키고자 한다면 시행하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기 십상인데 헛되이 날짜만 보내고 있는 것이 오래이니, 대사를 이루지 못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이제 본 관(館)의 육군 소위(少尉)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는 병학교(兵學校) 출신으로 병사를 훈련시키는 데에 익숙합니다. 이에 먼저 소위를 천거하여 임시로 그 일을 맡게 하면 또한 시일을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천거합니다. 이를 위하여 삼가 아뢰며 아울러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올립니다.}}</ref> 민겸호는 그 말을 그대로 따라서 별기군을 창설<ref>{{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1804023_003|제목=고종실록|성=|이름=|날짜=1881년(고종 18) 음력 4월 23일|권=18권|출판사=|장=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도 레이조를 군사들을 훈련하는 교사에 임명하다|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민겸호(閔謙鎬)가 아뢰기를,<br><ins>요사이 일본 사신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신(臣)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우창(洪祐昌)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군사들을 뽑아서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다. 육군 소위(陸軍少尉) 호리모도 레이조[掘本禮造]를 추천하여 훈련하고 교육시키는 스승으로 삼고, 또한 교장(敎場)을 선정하여 군사 훈련에 종사해야 한다.’</ins>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두터운 우의(友誼)에서 나온 말이므로 그의 뜻을 저버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br>(중략)<br>하니, 하교하기를,<br>아뢴 대로 하되, 군사를 뽑아 조련(操鍊)시키는 등의 일은 절목(節目)을 마련하고 장령의 직임은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에 구애하지 말고 가려 차임하도록 하라.'<br>하였다.}}</ref>하였고, 이것이 구식 군인들의 해묵은 불만을 폭발시켜서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민겸호와 별기군 교관들을 살해한 분노한 부대와 민중들은 경기감영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부사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하나부사는 공교롭게도 인천부에서 쉬고 있을 때 외국 증기선이 남양만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라, 먼저 바다로 나가서 기선을 기다리기로 했다. 월미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닻을 내린 그들은 하룻밤을 꼬박 새서 기다렸지만 기선을 전혀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튿날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서, 기선이 나와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안개 속에서 작은 배 하나가 나타났다. 장교들은 어부에게 총을 들이밀며 협박을 했고, 어부는 겁에 질려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서양 배를 봤다고 털어놓았다. 해가 높이 뜨자 안개가 걷혔다. 안개 속에서 기선의 윤곽이 보이자 일행은 허겁지겁 일장기를 높이 달았다. 기선은 일장기를 보고 일행을 태웠다. 이 배는 [[영국]]의 측량선 플라잉피시호였다. 초췌한 몰골에 놀란 선원들에게 공사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7월 29일 공사관을 탈출한 지 엿새 만에 나가사키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368&levelId=sk_011r_0010_0060_0080_0010|제목=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성=|이름=|날짜=1882년(고종 19) 음력 6월 12일|출판사=|장=일본 변리공사, 영국군함 플라잉 피시호에서 난을 피해 일본으로 가고 있다고 상주함|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일본국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삼가 아룁니다.<br>제가 앞서 우리 황제폐하의 명을 받들어 귀 국에 주차한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았으니 무엇을 헤아리겠습니까. 이번 달 23일 난민들이 청수관(淸水館)을 방화하니 수원(隨員)들이 힘을 다해 방어하다가 밤이 되었는데, 귀 조정이 파병하여 구원해줄 것을 간절히 바라였으나 끝내 그러한 일은 없었으므로, 포위망을 뚫고 벗어나서 대궐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숭례문(崇禮門)이 닫혀 있어 부득이하게 인천부로 피할 수밖에 없었고, 인천부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으나 인천부 군사 또한 난적과 합세하여 다시 피습해 오므로 수원들이 많이 죽였으며, 형세가 막아낼 수 없는 것이었기에 재차 제물포로 피하여 배를 탔는데, 다행히 영국 군함을 만나 지금 귀국하여 본국에 보고하려 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제가 명을 받들어 서울에 주재하여 갑자기 이러한 변란을 만나 돌연 귀국하게 되었으니 매우 유감이며, 수원 중 비록 생사가 확실하지 않은 자가 있어도 성상의 주의가 미치는 곳에서 반드시 각자가 목숨을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에 특별히 이러한 사유를 아뢰며, 가까운 날에 다시 건너와서 알현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성상(聖上)의 열람을 바라며, 아울러 평안하시기를 빕니다.}}</ref><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36&itemId=s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372&levelId=sk_011r_0010_0060_0120_0030|제목=일한외교자료집성(日韓外交資料集成)|성=|이름=|날짜=1882년(고종 19) 음력 6월 16일|출판사=|장=조선 주재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나가사키에서 임오군란 발발 상황을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전신으로 보고함|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이달 23일 오후 5시 격도(激徒) 수백 명이 갑자기 봉기하여 공사관을 습격하여 시석(矢石)과 총환(銃丸)을 날리고 방화하여 불태웠다. 진력하여 방어한지 7시간이 지났지만 정부의 원병이 오지 않았다. 한 쪽을 돌파하여 왕궁으로 가려해도 성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인천으로 후퇴하여 휴식하는 중에 인천부의 병사가 또 갑자기 봉기하여 습격했다. 순사 2명이 즉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외에 사상자가 있다. 겨우 뚫고나와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26일 남양 앞바다에서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시를 만나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부상자까지도 무사하다. 지금 나가사키에 도착했다.}}</ref>
[[파일:Chemulpo treaty resource 2.jpg|대체글=제물포 조약서의 3-4쪽.|섬네일|520x520픽셀|제물포 조약서의 3-4쪽.]]
하나부사는 8월 12일, 이번에는 군함 4척에 육해군 1천 명을 이끌고 다시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며칠 뒤 하나부사는 조정을 찾아가 주모자를 처벌하든지 전쟁을 하든지 선택하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다. 인천 개항은 20개월에 임오군란까지 더해져서 한참이 연기되어, 1883년 1월에 개항되게 된다. 현 북성동 일대가 그의 이름을 따서 '화방정(花房町)'으로 불리기도 했다.<ref name=":6">{{뉴스 인용|url=http://enews.incheon.go.kr:9080/publish/php/articleview.php?idx=12084&diaryDate=2017-04-13|제목=잉글랜드 리그 실력의 강화학당 축구팀|성=|이름=|날짜=2017년 4월 13일|뉴스=|출판사=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확인날짜=2018년 12월 8일}}</ref>
 
=== 열강의 창고로 전락하다<ref name=":0" />{{Rp|122-130}}===
일제는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월미도 북서쪽 땅 월미행궁 터 4,900평에 불법으로 석탄창고를 세웠다. 이후 1885년, 일본은 이 부지를 사들이려다 월미행궁 터이기에 매매가 불가함을 깨닫고는 '월미도 부지 4,900평을 조차하는 대신 매년 은화 80원을 납부하겠다'고 조정에 반강제로 제안을 했는데, 조정이 사정을 조사하니 애초에 땅을 일제에 빌려줬다는 기록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즉 일제는 일단 허락도 안 받고 석탄 창고를 지어놓은 뒤, 나중에 그 땅을 빌려달라고 뻔뻔하게 요구를 한 것이다. 조정은 처음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월미도에 (이미 들어왔지만) 다른 나라의 군사 시설을 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에 결국 양력으로 1891년 1월 12일,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를 맡은 민종묵은 일본의 근둥 대리공사와 '월미도 부지조차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ref>{{서적 인용
|url = http://sillok.history.go.kr/id/kza_12712012_004
|제목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인용문 = 월미도(月尾島) 부지 조차 약정서가 체결되었다.<br><br>〈조차월미도지기약단(租借月尾島地基約單)〉<br><br>이에 일본 정부는 해군을 위한 창고를 건조하고 석탄을 저장하기 위해 조선 경기도(京畿道) 월미도(月尾島) 중의 부지 총 4,900평(坪)을 【한 평은 사방 2미터이다.】 조차한다.<br>이 부지의 조차액(租借額)은 매년 은화 80원(圓)을 조선 정부에 완납하는 것으로 정하며, 바로 약정을 교환한 날로부터 계산하여 일본 공사관에서는 매 양력 12월 15일에 이듬해의 조차액을 미리 통리아문(統理衙門)에 교부하여 사수(査收)한다.<br><br>이에 약정서를 체결하고 아울러 지도를 첨부하여 신용을 밝힌다.<br><br>대조선 개국 499년 12월 12일<br><br>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종묵(閔種默)<br><br>대일본 명치 24년 1월 21일<br><Br>대리공사(代理公使)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ref><ref name=":17" />{{Rp|59}}[[파일:월미도 차입신청 지도.jpg|대체글=일제가 석탄 창고 부지 차입을 신청할 때 첨부한 지도.|일제가 석탄 창고 부지 차입을 신청할 때 첨부한 지도. 가운데 甲자가 그려진 사다리꼴이 석탄고이다.<ref name=":17" />{{Rp|22}}|프레임]]
 
그런데 이런 짓을 하려는 나라가 일제만 있는월미도를 노리는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도 월미도에 석탄 창고를 지으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월미도가 당시 군함의 동력원인 석탄을[[석탄]]을 조달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지배하는 나라만이 월미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으로 하나부사가 쫓겨나고 조선을 장악한 청나라는, 처음에는 [[산둥 반도]]에서 인천까지 거리가 짧아 석탄고를 요구하지 않았으나, 일제가 급격히 성장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1889년 12월 월미도 서북 지역에 석탄고를 설치하고 싶다고 조정에 요청을 한다. 그런데 여기는 이미 위 편지대로 일제가 석탄고를 지은 자리였다. 이에 청은 하는 수 없이 월미도 동쪽, 일제 석탄고 건너편에 부지를 마련했는데, 정작 창고를 안 지었다. 그러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청이 패배하면서 일제가 그 부지에 군수물자 창고를 짓게 된다.
 
이때 일제는 [[랴오둥반도]] 때문에 [[삼국 간섭]]을 당한다.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한 조정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제를 견제하려고 1896년 월미도 남쪽 지역 13,400평 부지를 러시아에게 내준다. 러시아는 마음 놓고 부두, 석탄고<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61&itemId=sa&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levelId=sa_001r_0030_0030_0360|제목=매천야록(梅泉野錄)|성=매천 황현|이름=|날짜=1900년(광무 4)|출판사=|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러시아인이 仁川 月尾島(인천 월미도)에 煤炭庫(매탄고)를 설치하였다.}}</ref>, 병원<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73&itemId=m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mk_007_0010_0230|제목=각사등록 근대편(各部請議書存案 )|성=|이름=|날짜=1896년 10월 27일|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외부소관 인천부영종진월미도 러시아인 煤庫병원터내 민의 무덤 이장비를 예산외에서 지불하기위한 청의서}}</ref>, 연병장, 사격장, 수도관까지 건설할 수 있었다.<ref name=":17" />{{Rp|59}} 한편 미국의 석유 제품 회사 타운센드는 조선의 석유 제품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1894년부터 [[부산]] [[절영도]]와 월미도 등에서 부지를 물색하였고, 그 해 월미도에 5백만 갤런 규모 석유저장고를 건설하였다. 이후 이들은 나중에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조선특약점 계약을 맺어 조선의 송인석유 판매권을 전부 장악하였다.<ref>{{웹 인용|url=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제목=미국 타운센드 상회, 일상을 바꾼 석유|성=|이름=|날짜=|웹사이트=우리역사넷|출판사=|확인날짜=2018-12-07}}</ref>
 
====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통째로 팔아넘겨지다 ====
1899년 봄 조선인 김준희, 임원상 조정의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외국 석탄고와 민가 53호(월미도 주민들의 마을)를 제외한 월미도 전체를 개간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후 이들은 월미도 섬 그 자체를 요시가와 시타로(吉川佐太郞)라는 일본 상인에게 15만 원을 주고 팔아넘겼다. 일본 상인은 월미도 땅에 다음과 같은 팻말을 설치했다.{{인용문2|일본, 미국, 러시아의 석탄고와 민가 53호를 제외하고 모든 땅은 대일본인 요시카와 시타로의 소유이다.}}
1899년 봄 조선인 김준희, 임원상 조정의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외국 석탄고와 민가 53호(월미도 주민들의 마을)를 제외한 월미도 전체를 개간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후 이들은 월미도 섬 그 자체를 요시가와 시타로(吉川佐太郞)라는 일본 상인에게 15만 원을 주고 팔아넘겼다. 일본 상인은 월미도 땅에 다음과 같은 팻말을 설치했다.{{인용문2|일본, 미국, 러시아의 석탄고와 민가 53호를 제외하고 모든 땅은 대일본인 요시카와 시타로의 소유이다.}}그런데 조선인들이 판 권리는 개간권이었지, 소유권이 아니었다. 따라서 개간권으로 토지를, 그것도 외국인에게 판 행위는 엄연한 불법이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은 김준희, 임원상과 그와 연루된 조선인(강면희, 정규만, 문성진, 송정섭)을 즉시 체포, 처벌<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73&itemId=mk&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5&levelId=mk_035_0270_0440|제목=각사등록 근대편(司法稟報(乙))|성=|이름=|날짜=1900년 12월 7일|권=27|출판사=|장=인천항 월미도개척 인허와 관련하여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긴 송정섭·강면희·정규만·문성진 등의 처벌을 보고|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ref><ref>{{서적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id/wza_13811022_003|제목=고종실록 45책|성=|이름=|날짜=1901년(고종 38) 11월 22일|권=41권|출판사=|장=신기선이 죄인에 대한 처리 문제를 건의하다|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전략)김준희, 임원상은 법의 뜻을 생각지 않고 몰래 문빙(文憑)을 만들어 막중한 공토(公土)를 외국인에게 천매(擅賣)하였으니 그 죄상을 따지면 해당하는 형률이 있을 것이나 미리 기미를 눈치 채고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붙잡지 못하였습니다. 피고 김준희, 임원상은 《대명률(大明律)》 〈명례(名例)의 범죄사발재도조(犯罪事發在逃條)〉의 범죄 사실이 드러난 후 도망친 자는 여러 증거가 명백한 경우 사건이 성립된 것과 동일하여 심문할 것이 없다는 법조문, 「외국에 의뢰하여 나라의 체모를 치손한 자의 처단 예」 제2조에 비추어 다음의 범죄자는 이수, 미수를 막론하고 《대명률》 〈적도편(賊盜編) 모반조(謀叛條)〉에 비추어 처단한다는 규정, 같은 조 제6항 각 국과의 약장(約章)에 허용한 지역을 제외한 일체의 전토, 삼림, 천택을 외국인에게 잠매한 자와 《대명률》 〈적도편 모반조〉의 모든 모반은 공모자 일지라도 수종(首從)을 가리지 않는다는 법조문, 형률(刑律) 명례(名例) 제6조에 의하여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고, 피고 강면희와 정규만은 《대명률》 〈수장편(受贓編) 관리 수재조(官吏受財條)〉 녹을 받는 사람이 법을 굽히지 않은 장〔不枉法贓〕 120관의 율에 비추어 모두 태(笞) 100 종신 징역에 처하며 피고 문성진은 동 률(律) 〈사위편(詐僞編) 사전조지(詐傳詔旨) 조〉 각 아문(衙門)에 1품, 2품 아문관의 말이라고 거짓말하여 공사(公事)에 분부한 자의 율에 비추어 태 100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송정섭은 동 률 〈수장편 관리 수재 조〉의 거간(居間)을 하고 돈을 받은 자율에 비추어 태 100 징역 2년에 처하며,강면희 이하 여러 범인 등은 원래 적용한 율에 의해 처단해야 하겠으나 범죄가 대사령(大赦令) 이전에 있었고 또 한 해나 갇혀 있었으니 참작하여 용서할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각각 본률(本律)에서 2등을 감하여 강면희, 정규만은 모두 태 100대 징역 10년, 문성진은 태 80 징역 2년에, 송정섭은 태 80 징역 1년에 처합니다.’ 하였습니다.<br>당해 범인 강면희 등은 원래 적용한 율에서 감등 처리하고 김준희, 임원상은 붙잡은 다음에 율에 의해 집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br><br>하니, 제칙을 내리기를,<br><br>'아뢴 대로 하라. 징역은 모두 유배형으로 바꾸라.'<br><br>하였다.}}</ref>하고 다시 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상인은 쉽게 되팔려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배후로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일제가 지목된다.<ref name=":0" />{{Rp|130-133}}<ref name=":17" />{{Rp|60}}
 
=== [[러일 전쟁]]에서 [[제물포 해전]]의 현장이 되다<ref name=":0" />{{Rp|136-152}}===
{{참고|러일전쟁|제물포 해전}}
따라서 월미도에서 일제와 러시아의 긴장도는 최고조에 달할 수밖에 없었고, 월미도 어딘가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1903년 8월 전쟁을 예감한 각국 열강은 자국 공사관 호위와 정찰을 목적으로 군함을 파견하였다. [[영국]]이 가장 먼저 시리어스 함을 보냈고, [[미국]]이 빅스버그 함, [[프랑스]]는 파스칼 함, [[이탈리아]]는 엘바 함, [[독일]]은 한사 함을 파견했다. 일제는 치오다 함을 파견했고, 러시아는 1904년 1월에 최신 순양함 바략, 6일 뒤에는 소형 포함 카레이츠 호를 제물포에 입상시켰다입항시켰다. 이들은 모두 월미도 서쪽 앞바다에 정박했는데, 그 늘어선 모습이 누가 보면 국제 함선 박람회가 열린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한 달 동안은 매일매일이 폭풍전야였다. 일제 함대가 총 14척인 데 반해 러시아는 배가 바략 호와 카레이츠 호 2척밖에 없었다. 승부는 이미 갈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루든예프 함장은 항복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최정예 함선인 바략함을 일제에 빼앗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장병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인용문2|일본 해군 제독이 말하기를, 러·일 양국의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러시아 함대는 정오까지 제물포항을 떠나라고 한다. 러시아 해군에게 항복이란 없다. 우리는 일본 함대와 싸운다. 피 한 방울이 남는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자! 자비로우신 주님을 믿고 기도하며, 용감히 싸움터로 항진해 가자. 주님과 황제, 조국을 위해! 만세, 만세, 만세!}}
그리하여 1904년 2월 9일 오전 11시 44분, 우리우 제독이제독의 지휘로 일본의 아사마 함이 제물포로 나온 바략 함에게 포탄을 쏘면서 [[제물포 해전]]은 막을 올렸다. 바략함과 카레이츠 호 둘 다 대응 포격을 했으나 카레이츠 함의 포는 사정거리가 짧아 일본 함대에 닿지 않았다. 바략 함 혼자서 일본 함대 전체와 싸우는 셈이었다. 바략 함은 결사항전했으나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12시 12분 바략함은 [[팔미도]]에 다다라서 포위를 벗어나 외해로 도망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포탄 한 발이 조종간에 정확히 떨어졌다. 바략함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고빠진 바략함은 팔미도로 미끄러져 가다가 갯벌에 좌초되었다. 일본 함대는 이때다 싶어서 전광석화로 접근하여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또다시 그 순간, 바략함이 한 번 크게 기우뚱하더니 기적처럼 모래톱을 빠져나왔다. 바략함과 카레이츠 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정박지로 후퇴했다. 러시아 함대가 월미도 정박지에 가까이 가자 일본 함대는 포격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주위에 정박한 외국 함선에 포탄이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시 45분 전투가 종료되자마자 외국 함선들은 군의관을 태운 보트를 보내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단 한 척도 일제에게 내줄 수 없었던 루든예프 함장은 러시아 장병들을 외국 함선으로 대피시킨 뒤, 카레이츠 호를 폭파하고 바략함에 불을 붙여 침몰시킨다.
 
==== 일제의 군사 기지가 되다<ref name=":0" />{{Rp|152-154}}====
 
==== 근대 항구 시설이 건설되다 ====
[[파일:월미도 무선 전신소.jpg|왼쪽|프레임|한반도 최초의 전신소인 월미도 무선 전신소. 일반 대중의 전보는 받지 않고 군사 전보만 취급하였다.<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2&itemId=su&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3&levelId=su_002_1914_07_28_0470|제목=일제침략하한국36년사|성=|이름=|날짜=1914년 7월 28일|권=2권|출판사=|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무선전신시설(無線電信施設)은 월미도(月尾島), 목포(木浦) 항문도(港門島)(목포항(木浦港)) 및 소청도(小靑島)(해주(海州)冲) 4개처(個處)에 있으며 이것은 구한국시대(舊韓國時代)로부터 설치되어 있는 것이나 <ins>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는 공중용(公衆用)으로 사용(使用)을 금(禁)하고 있다.</ins>}}</ref> 1923년 인천 무선 전신국이 문을 연 데 이어, 1925년 경성 무선 전신국이 확장되면서 폐쇄되었다. 이후 1932년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만다.<ref>{{웹 인용|url=http://park.incheon.go.kr/board/3317/1987115?curPage=1&bbsNo=3317&startDay=&endDay=&searchTy=1&searchVal=%EB%AC%B4%EC%84%A0&cntPerPage=8|제목=월미공원-월미도 무선 전신소|성=방혜미|이름=|날짜=|웹사이트=인천의 공원|출판사=|확인날짜=2018-12-09}}</ref>|대체글=월미도 무선 전신소를 찍은 사진.|섬네일]]
일제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을 완전히 마무리짓고 [[을사조약]]에 연이은 [[한일 병합 조약]]으로 1910년 8월 22일 조선의 국권을 피탈하였다.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일제는 인천에서 쌀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월미도에 근대 항구 시설을 속속 지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에는 월미도 북단과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방파제를철로를 놓았다. 처음으로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그때 [[소월미도]]에 작은 부두도 같이 지었다. [[만주]]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1907년에는 월미도 남서쪽 끝에 해양검역소(밑 관광지도)를 설치했다. 1910년에는 월미산 정상에 무선 전신소도 세웠다.<ref name=":0" />{{Rp|159-160}}
[[파일:소월미도 등대.jpg|대체글=소월미도 등대에서 영종도 일대를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이다. 조선 명소를 소개하는 관광엽서로 제작되었다. 대정 8년(1918년)에 발행된 우표가 붙어 있고 소화 11년(1936년) 경성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섬네일|520x520픽셀320x320px|소월미도 등대에서 영종도 일대를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이다. 조선 명소를 소개하는 관광엽서로 제작되었다. 대정 8년(1918년)에 발행된 우표가 붙어 있고 소화 11년(1936년) 경성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다.<ref>{{웹 인용|url=http://park.incheon.go.kr/board/3317/1397109?curPage=1&bbsNo=3317&startDay=&endDay=&searchTy=1&searchVal=%EC%86%8C%EC%9B%94%EB%AF%B8%EB%8F%84&cntPerPage=8|제목=월미공원-소월미도의 등대(1920년대 초)|성=방혜미|이름=|날짜=|웹사이트=인천의 공원|출판사=|확인날짜=2018-12-09}}</ref>]]
이때 일제가 건설한 시설 가운데 눈여겨볼 만한 것은 1903년 일제의 강압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세운 소월미도 [[등대]]로, [[팔미도]] 등대와 같은 시기에 설치되어 인천항의 눈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인천항의 수심이 너무 낮아 [[만조]] 때가 아니면 배가 진입할 수 없는 문제는 여전했는데, 이는 1918년 [[갑문]]식 선거(도크)가 설치되면서 해결된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배들은 만조가 아닐 때마다 월미도에 정박하지 않아도 되었다. 갑문을 설치하면서 1917년 일제는 월미도와 육지를 잇던 철로 자리에 돌을 쌓아 방파제를 지었다. 철로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개통되어 열차로 수송할 화물의 양이 줄어드면서 1911년 철거되었다철거된 상태였다. 새로 쌓은 방파제는 파도와 북쪽에서 흘러오는 모래펄이 항구와 선거에 쌓이는 것을 막아주었다. 몇 년 후에는 [[시멘트]]를 바르고 철제 난간을 달아 1㎞ 남짓한 왕복 2차선 도로를 닦았다. 월미도는 이제 나룻배를 잡아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아무 때나 걸어서든 차를 타서든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ref name=":0" />{{Rp|160-163}}
 
==== 경제를 살리기 위해 유원지로 개발되다<ref name="근교">{{서적 인용|제목=서울근교여행|저자=유연태|판=초판|출판사=넥서스BOOKS|쪽=88|초판발행일자=2005-5-20|출판위치=서울}}</ref>====
이 무렵 인천의 경기는 예전만 못했다. 조선에 [[경부선]]과 [[경원선]] 등 철도가 놓이면서 항구로 무역을 할 필요가 옅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인천부는 총독부 철도국에게서 철도용지를 무상으로 임대받아 도로를 정비, 벚나무를 심고,<ref name=":17" />{{Rp|49}} 1918년에는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하여 유원지로 개발하였다. 가까운 경성에서 관광객을 끌어모음으로써 인천의 경기를 활성화하고 나아가 인천의 인구까지 늘어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제방을 쌓고 월마도를방파제를 개축한 것도 이 관광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즈음 일제가 강제로 세운 석탄고도 철거되었다.<ref name=":7">{{웹 인용|url=http://park.incheon.go.kr/board/3317/1987120?curPage=1&bbsNo=3317&startDay=&endDay=&searchVal=&cntPerPage=8|제목=월미공원-일본해군 석탄고|성=방혜미|이름=|날짜=|웹사이트=인천의 공원|출판사=|확인날짜=2018-12-08}}</ref><ref name=":0" />{{Rp|163-164}}
 
실제로 월미도는 유원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일단 경치가 빼어났다. 서쪽으로는 서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인천항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또 원래부터 살구나무가 많은 데다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 일본에서 [[벚나무]]를 많이 들여와 심었기에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여, 섬 전체가 하얗게 물들어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21년 일본의 공원학자 다무라 박사가 공원 설비를 위해 월미도를 둘러보고는 '동양 제일의 절경'이라며 감탄을 할 정도였다. 거기에 교통도 편리했다. 서울에서 인천역까지 1시간 40분, 인천역에서 월미도까지 가는 데 걸어서 20분이었다. 서울에서 오전에 출발에 월미도에서 해수욕을 즐기다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 당일치기 여행지로 딱이었다.<ref name=":0" />{{Rp|164-165}}
 
[[파일:이름을 붙인 월미도 관광지도.png|대체글=이름을 붙인 월미도 관광지도.|섬네일|1100x1100픽셀820x820px|월미도 관광지도. 각 시설의 이름을 임의로 표기하였다. [[:ja:吉田初三郎|요시다 요츠사부]] 作.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인천부에서 시작한 월미도 개발은 1923년에 일본인 유력자들로 구성된 '월미도유원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이 회사는 월미도 다리가 놓이자 북쪽 산기슭에 각종 시설을 지었다. 이때부터 해수욕장, 호텔, 별장, 고급 유흥주점, 상가 등 부대, 위락시설이 하나둘씩 들어선다. 월미산 둘레를 한 바퀴 빙 도는 일주도로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닦았고, 그 주위에 벚나무를 심었다.
 
===== 월미조탕 =====
[[파일:월미조탕 수영장 풍경.jpg|대체글=월미조탕 물놀이장 풍경 채색사진.|섬네일|400x400픽셀|월미조탕 물놀이장 풍경 채색사진.]]
월미도! 하면 바로 월미조탕이 떠오를 만큼 조탕은 큰 인기를 끌었다. 조탕(潮湯)은 목욕탕이나 온천과 비슷한데, 바닷물을 끓여서 목욕물로 썼다. 조선인에게 '수영장'이란 그야말로 문화 충격이었다. 1923년 7월 10일 개장한 첫날 하루에만 이용객이 500명이 넘었고, 월말에는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비누 한 장에 2전, 수건 한 장에 1전이었다.<ref name=":0" />{{Rp|165}}
 
===== 임해학교 =====
[[파일:임해학교.png|대체글=임해학교 교사 사진|왼쪽|임해학교 교사. 2층 건물에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ref name=":8">{{웹 인용|url=http://park.incheon.go.kr/board/3317/1987112?curPage=1&bbsNo=3317&startDay=&endDay=&searchTy=1&searchVal=%EC%9E%84%ED%95%B4%ED%95%99%EA%B5%90&cntPerPage=8|제목=월미공원-인천임해학교|성=방혜미|이름=|날짜=|웹사이트=인천의 공원|출판사=|확인날짜=2018-12-08}}</ref>|프레임]]
임해(臨海)학교는 '바닷가 학교'라는 뜻으로, 정식 학교는 아니고 경성과 인천의 학생들이 여름방학 동안 심신을 단련하러 오는, 말하자면 수련원이었다. 애국부인회 인천지부와 간호부인회 인천지부, 그리고 일부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1923년부터 하계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40일간 개교하였다.<ref name=":8" /> 물론 이런 좋은 시설이 대개 그렇듯이하지만 조선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ref name=":0" />{{Rp|169}}{{인용문2|인천항 월미도 산록에 재한 임해학교는 아동으로 하야금 광할웅대한 대자연에 접케하야써 심신의 전환을 도한다는 목적으로 금반불소한 자금을 투하야 신설하고 내 이십칠팔일 경에 개교되리라는대 이에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도 참가코저 누차교섭하얏스나 <u>조선인학교라는 구실 하에 퇴각을 당하고 조선인 학생은 다만 그 부근 해수욕장에서 수영만 하기로 되얏다더라.</u> -《[[동아일보]]》, 1923년 7월 23일.<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23-07-23&officeId=00020&pageNo=1|제목=思想界(사상계)의不穩(불온) 生活不安(생활불안)의反映(반영)|성=|이름=|날짜=1923년 7월 23일|웹사이트=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동아일보|출판사=|확인날짜=2018-12-08|추신=. 4면, 위에서 세 번째, 맨 왼쪽}}</ref>}}
 
===== 해수욕장 =====
===== 사슴 동산 =====
[[파일:월미도 사슴 동산.png|대체글=월미도에 있던 사슴 동산을 찍은 사진.|왼쪽|섬네일|600원짜리 사슴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목책을 두르고 그 안에 [[사슴]]을 풀어 놓은 월미도 녹(鹿)원에는 [[원숭이]]도 있었다고 한다. 사슴들은 1929년 4월 26일에 방목되었고, 9월 21일에는 누가 쏴 죽여서 인천부에서 사살자를 고발한 적도 있다.<ref>{{웹 인용|url=http://park.incheon.go.kr/board/3317/1987110?curPage=3&bbsNo=3317&startDay=&endDay=&searchVal=&cntPerPage=8|제목=월미공원-월미도 녹원|성=방혜미|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18-12-09}}</ref> 1930년에는 사슴을 추가로 구입하기 위해 1200원을 들이기로 했는데, 도로와 같은 필수 시설물 보수나 할 것이지 쓸데없는 데다가 돈을 쓴다고 비판을 받았다. 결국 금액은 600원으로 감액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30-04-05&officeId=00020&pageNo=1|제목=6면 맨 오른쪽 위, 月尾島公園(월미도공원) 施設費大削减(시설비대삭감)|성=|이름=|날짜=1930년 4월 5일|뉴스=동아일보|출판사=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확인날짜=2018년 12월 9일|인용문=시내에 긴급한 도로 구거 가튼 시설은 등한히 하고 부민 직업 생활상하등 통양을 늣기지 안는 <ins>월미도 공원에 사슴 구입비 일천이백 원</ins>과 도로 신설비 일천오백 원과 천막생활자의 편의를 위하는 매점 건축비 일천오백 원을(...)을 계상한 것은 만만부당하다<br>(중략...)<br>결국 채결한 결과에 수정안 찬성 다수로 전긔사슴구입비 일천이백 원은 륙백원으로 감액하고...<br>(후략)}}</ref>
 
===== 용궁각 =====
 
===== 아고타 신사 =====
[[파일:월미도 아고타 신사.png|왼쪽|섬네일|애탕신사. 지금의 인천여상에 위치했던 인천신사 본원의 경외사였다. 일제는 인천을 영구히 그들의 영토로 만들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서 월미산 정상에 신사를 세워 바다와 함께 살아왔던 인천의 풍속과 정신을 거세하려 했다.<ref>{{웹 인용|url=http://park.incheon.go.kr/board/3317/1397077?curPage=1&bbsNo=3317&startDay=&endDay=&searchTy=1&searchVal=%EC%8B%A0%EC%82%AC&cntPerPage=8|제목=월미공원-월미산 정상의 애탕신사(1908)|성=방혜미|이름=|날짜=|웹사이트=인천의 공원|출판사=|확인날짜=2018-12-09}}</ref> 해방 이후 성난 군중에게 파괴되어 봉안전에 오르는 계단만 남아 있다가 한국전쟁 때 그마저도 없어졌다.<ref>{{웹 인용|url=http://park.incheon.go.kr/board/3317/1987109?curPage=1&bbsNo=3317&startDay=&endDay=&searchTy=1&searchVal=%EC%8B%A0%EC%82%AC&cntPerPage=8|제목=월미공원-월미도 애탕신사|성=방혜미|이름=|날짜=|웹사이트=인천의 공원|출판사=|확인날짜=2018-12-09}}</ref>]]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8년 월미산 정상에 있던 [[서낭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아고타(애탕, 愛宕) [[신사 (신토)|신사]]를 지었다. 여기에는 전쟁의 수호신을 모셔서, 앞으로 벌일 무수히 많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이렇듯 월미도는 일본인에게 특별한 역사적 명소였는데, 그 각별한 사랑이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인용문2|월미산 정상에서 청일전쟁이 시작된 풍도(楓島)와 제국의 전함이 러시아를 격침시켰던 바다를 바라보며 일본제국의 역사를 회고하라.|《조선철도여행안내》, [[조선총독부]] 철도국, 1915년<ref name=":17" />{{Rp|61}}}}
 
==== 입장 인원과 입장료 ====
 
==== "단 한 뼘도 조선인의 땅이 아니었다" ====
[[파일:윤치호 월미도.jpg|대체글=윤치호와 그 가족들이 월미도에 간 것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와 사진|섬네일|700x700픽셀520x520px|윤치호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월미도단신〉. 윤치호와 그 가족들이 텐트 앞에 서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 곤궁하게 사는 조선인들에게 월미도 유원지 여행이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가 이런 식민지 인공낙원을 건설한 것은 식민지화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도 있었다. 변절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친일파 [[윤치호]]는 가족과 월미도로 여행을 가기<ref>{{뉴스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80900209201001&officeId=00020|제목=4면 맨 왼쪽 위, 월미도단신|성=윤치호|이름=|날짜=1931년 8월 9일|뉴스=동아일보|출판사=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확인날짜=2018년 12월 9일}}</ref> 전 다음과 같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설파하는 일기를 남겼다.<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sa&types=o&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a_032r_0070_0070_0240&position=-1|제목=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성=윤치호|이름=|날짜=1931년 7월 24일|권=8집|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확인날짜=2018년 12월 9일}}</ref>{{인용문|'''1931년 7월 24일《금요일》 흐리고 시원함. 비.'''<br>서울 집이다. 오전 8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많은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치고 난 뒤 가족들과 함께 해수욕하러 제물포에 갔다. 1883년 내가 푸트 장군과 함께 조선에 돌아왔을 때만 해도 제물포에는 어부들이 높은 언덕 위에 지은 토막(土幕)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 손길이 닿은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조 500년 동안 사람들이 해놓은 일이라고는 그저 언덕과 섬의 나무를 베어낸 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일본인은 이 해변과 주변의 작은 섬들을 안락한 주거지와 매혹적인 여름 휴양지로 탈바꿈해놓았다. 월미도는 잘 닦인 도로를 통해 육지와 연결되었고, 섬 전체가 수상 휴양지로 변모되었다. <ins>이 섬의 단 한 뼘도 조선인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ins> 하지만 누가 그 사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br>오후 3시 10분 기차로 서울로 돌아왔다.}}그는 이후에도 수 차례 조탕을 드나들었다.<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61&itemId=sa&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37&levelId=sa_034r_0050_0090_0270|제목=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성=윤치호|이름=|날짜=1943년 9월 27일|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오전 7시 25분 기차로 월미도 해수온천에 갔다. 6월 21일부터 오늘까지 해수목욕을 하러 총 14번 왕복한 셈이다. 지독하게 건조하고 무더운 날씨가 몇 달째 계속되었던 차에 이 왕복행차가 내 건강에 요긴했음에 틀림없다. 건강을 지켜주신 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11시 5분 기차로 경성에 돌아왔다.}}</ref>
 
한편 오히려 일본인보다 (부유한) 조선인들이 많이 찾아왔다는 증언도 있다.<ref name=":0" />{{Rp|188-189, 194}}
 
=== 도둑처럼 광복이 찾아오다 ===
[[파일:월미도 1948년 10월.jpg|대체글=1948년 10월 찍은 월미도. 마을과 미군 막사가 보인다.|프레임|월미도. 1948년 10월. 마을과 미군 막사가 보인다.|섬네일|320x320픽셀]]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광복은 그야말로 도둑처럼 찾아왔다. 개항 당시 348명에 불과했다가 패전 때 2만 명에 이를 만큼 늘어났던 월미도의 일본인들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도망하기에 바빴다. 패전 소식을 들은바빴고, 일본 관리들은 공문서를 모조리 태우는 등 조선에서 저지른 추악한 행태를 덮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인천을 '조선의 작은 일본, 진센({{Llang|ja|仁川|Jinsen}})'이라 부를 만큼 인천에 애정이 깊어서, 100명 정도는 1946년까지 버티다가 귀환했다. 이때 이들이 인천역에서 월미도를 굽어보면서 불렀다는 노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인용문3|mid|잘 있거라 인천아 이별 후에도 벚꽃은 무사히 피어나렴<br>머나먼 고향에서 쓸쓸한 밤에는 꿈에도 울리겠지 월미도야<br>기차는 떠나가고 항구는 희미한데 이제 이별의 눈물로 외치나니<br>뜨거운 인사를 받아줘요 그대여 고마웠어요 부디 안녕!|<ref>{{저널 인용|제목=행정자료 불태우고 소월미도 등대 폭파|저널=굿모닝 인천|성=이희환|이름=|url=http://goodmorning.incheon.go.kr/board/54/1913836?curPage=&codeNm=2015/08&codeText=%EA%B4%91%EB%B3%B5%2070%EB%85%84,%20%EA%B7%B8%EB%A6%AC%EA%B3%A0%20%EC%9D%B8%EC%B2%9C|날짜=2015년 8월 4일|출판사=}}</ref>}}8월 27일 일본인들이 미군 상륙을 조금이라도 늦추려고 소월미도 등대를 폭파하고 얼마 지나 9월 8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미군 제7보병사단을 태운 함선을 이끌고 월미도 앞바다에 정착한다. 이듬해 4월 미 군정은 월미도를 해안경찰대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했다. 1948년 4월 남한 단독선거를 앞두고 있을 때는 월미도에 방문한 유람객들에게 [[삐라]]가 뿌려지기도 했다.<ref>{{뉴스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6&itemId=npg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npgn_1948_04_21_v0002_0250|제목=「프랑카―트」압세우고 仁川서 排單示威|성=|이름=|날짜=1948년 4월 21일|뉴스=남선신문|출판사=|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인천(仁川)廿일발합동(日發合同)】지난 십팔일수만명(十八日數萬名)의 유람객(遊覽客)이 모인 월미도(月尾島)에서 단선반대(單選反對)의 『삐라』를 다수산포(多數散布)한 사실(事實)이있었는데 부내(府內)도 원동사(園洞四)가리(里)에서도 오십여명(五十餘名)의 군중(衆)이 단선반대남북협상절대지지등(單選反對南北協商絶對支持等)의 『프랑카―트』를앞세우고 시위행렬(示威行列)을 하다가 해산(解散)을 당(當)하였다한다 그리고 한편(便) 지난 십륙일시흥군(十六日始興郡)수암면성(岩面城)포리근처(里近處)에서는 전주삼개(電柱三個)를 철거(撤去)한 사질(事質)이잇서 부평대전간통화(富坪大田間通話)가 일시부통(一時不通)되였다한다}}</ref> 월미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었던 사람이 경감을 사칭하여 극진한 대접을 받다가 정체가 탄로나 동석한 경감에게 체포당하는 일도 있었다.<ref>{{서적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6&itemId=npgn&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levelId=npgn_1948_07_23_v0002_0240|제목=가경감의 연회원정 경관친목연에: 하로강아지 범 모르는 격|성=|이름=|날짜=1948년 7월 23일|출판사=남조선민보|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인용문=【인천일일발합동】경감이라 사칭하고 현직경관을 농락한 우습고도 웃지못할 사건이 발생하엿다. 즉 주소를 서울에 둔 김의선(金義善)이라는 자는 경무부수사국정보과근무 경감이다 사칭하고 지난 십구일하오경 인천현직경관이 중심이된 친목회에 당당히 참석, 팔미도까지 선유하는동안 상좌의 후대를 받고 제이차로 월미도모료정에서도 상빈의 호화로운 대접을 받고 있든 중 정체가 탄로되어 동석경관의 연락으로 드듸어 체포되고 말었다 한다.}}</ref> 그리고 몇 년이2년 흘러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ref name=":0" />{{Rp|200}}
 
=== 한국전쟁이 발발하다 ===
 
==== 인민군이 월미도를 접수하다 ====
{{참고|한국 전쟁}}
남북에 정부가 수립되자 미군은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수했다. 월미도에서도 미군이 나갔는데, 그 자리에 바로 한국 해군이 들어왔다. 한국 해군은 한국 전쟁이 터지자마자 월미도에서 잽싸게 철수했는데, 북한군이[[북한군]]이 한강을 넘지 못하고 발이 묶이자 다시 월미도로 돌아왔다. 며칠 후 북한군이 한강을 넘자마자 한국 해군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을 갔고, 곧이어 인민군이 월미도에 들어왔다. 육지가 거의 다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으므로 월미도민 대부분은 피난을 가지 못했고, 배가 있는 몇몇 가족만 [[영종도]]나 [[작약도]]로 가까스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예상과는 달리 월미도에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고않았는데, 피난한이를 본 사람들피난자 일부는 다시 월미도로 돌아오기도 했다. 당시 18세였던 월미도 주민 이범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ref name=":0" />{{Rp|202-203}}{{인용문2|해군이 완전히 후퇴한 그날 인민군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인천에서 월미도 다리를 건너기 전에 얼음공장이 있었는데, 그곳에 인민군이 전차를 세워놓고는 바로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작약도로 피난을 가 있었어요. 그리고 며칠 뒤, 아마 한 오후 4-5시 경이었을 거예요. 해가 저물 무렵인데 월미도를 쳐다보니까 인민군 전차가 월미산에 포를 한 세 발 쏘더라고.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죠. 그런데 연기만 나고 아무 대항이 없었지. 그 후 우리 가족은 배를 수소문해서 다시 월미도 원래 살던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리고 다시 영종도로 가서 며칠 있다가 월미도로 돌아왔어요. 그 뒤로는 쭉 월미도에 있었어요. 영종도에서 월미도로 올 때 배에서 내리니까 인민군 장교로 보이는 사람이 우릴 부르더니 신분을 물어보고, 뭐 하는 사람이냐, 어디 갔다 오냐고 묻더라고. 피란 갔다 돌아왔다고 하니 이것저것 다 물어본 다음 집으로 보내줬어요. 좀 겁이 났지. 겁이 났는데 내가 죄진 건 없으니까 무슨 일이야 생기겠냐 생각했지요.
<ref name=":0" />{{Rp|203-204}}}}
 
 
==== 네이팜탄으로 "푹 젖다"{{refn|집중폭격(Saturation)을 비유적으로 '땅을 푹 적시다'라 이른다.<ref name=":17" />{{rp|85}}<ref name=":0" />{{rp|238}}|group="주"}}====
그리하여 합참은 1950년 9월 9일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하였다. 작전의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월미도 무력화였다. 그 다음으로는 인천 상륙, [[김포]] 비행장 확보, [[서울]] 탈환이 있었다.<ref name=":0" />{{Rp|220}}
[[파일:폭격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월미도 해변.jpg|대체글=폭격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월미도 해변 사진.|프레임|폭격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월미도 해변.]]
그리하여 합참은 1950년 9월 9일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하였다. 작전의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월미도 무력화였다. 그 다음으로는 인천 상륙, 김포 비행장 확보, 서울 탈환이 있었다.<ref name=":0" />{{Rp|220}}
 
당시 인민군은 월미도민과 인천 시내에서 강제로 끌고 온 노무자들을 동원하여 월미산 둘레길을 따라 위 아래 두 줄로 교통호를 내고, 방공호, 벙커, 사격 진지를 구축하였다. 방어 병력은 주로 월미산 서쪽 진지에 배치되어, 고사포, 해안포,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채 바다를 경계했다.
 
===== 미군이 '녹색해안'을 점령하다 =====
[[파일:마운틴 맥킨리 호 위 맥아더.jpg|대체글=마운틴 맥킨리 호에서 맥아더가 전황을 지켜보는 사진|왼쪽|섬네일|600x600픽셀|마운틴 맥킨리 호 함상에서 맥아더가 전황을 지켜보고 있다.]]
 
====== 오전 5시 ======
10일과 12일 두 차례에 걸쳐 민간인을 사살한 미군은 15일 오전 5시에 콜셰르 폭격기 8대를 동원하여 이번에는 섬 전체에 폭격을 퍼부었다. 인민군은 이에 대응 사격을 하였으나 별 효과는타격은 없었다. 폭격기가 물러나자 순양함 6척과 구축함 4척이 월미도에 함포 사격을 가해 인민군 참호를 파괴했다.<ref name=":0" />{{Rp|248-250}}<ref name=":10">{{뉴스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4&itemId=dh&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1&levelId=dh_018_1950_09_15_0010|제목=유엔군, 인천상륙작전 개시|성=|이름=|날짜=1950년 9월 17일|뉴스=부산일보|출판사=|확인날짜=2018년 12월 11일}}</ref>
 
====== 오전 6시 ======
[[파일:그린비치로 향하는 상륙주정.jpg|대체글=상륙주정이녹색해안으로 녹색해변으로돌진하는 질주하는 사진상륙주정|왼쪽|섬네일|상륙주정이 녹색해안으로 질주하고돌진하고 있다.]]
6시, 만조 때는 해병대원들이 탄 상륙주정에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원을 그리며 선회하던 상륙주정들은 '녹색해안(그린비치, 월미도 북쪽 해변)'으로 돌진했다. 이때 로켓포함 3척이 월미도 북쪽으로 접근하여 5인치 포탄을 1천여 발 사격해 상륙지점에 '화막'을 형성하여 해병대원을 엄호하였다.<ref name=":0" />{{Rp|250-251}}
[[파일:월미도에 상륙한 미군에 항복하는 인민군 01.jpg|대체글=월미도에 상륙한 미군에 항복하는 인민군 사진|섬네일|500x500픽셀400x400px|인민군이 월미도에 상륙한 미군에게 두 손 들고 항복하고 있다.]]
상륙 예정 시각이 가까워지자 함대는 포격을 한꺼번에 멈췄다. 상륙정들은 월미도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6시 31분, 예정 시각을 딱 1분 넘기고 상륙정 7척이 해안에 닿았다. 항공기는 40-50미터 전방을 기총소사로 훑고, 해병대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두 번째 대열도 해안에 닿았다. 그러나 인민군은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았다. 대오를 정돈한 미군은 월미산 정상으로 치고 올라갔다. 세 번째로 도착한 전차 중대에서는 탱크와 불도저전차도저전차, 화염방사기 전차가 상륙했다. 인민군은 이미 폭격을 견디느라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간혹 저항하는 인민군은 탱크가 진지 입구로 포탄을 쏘거나 불도저전차가도저전차가 흙더미를 밀어붙여 산 채로 땅에 묻어버렸다.<ref name=":0" />{{Rp|251}}
 
6시 55분, 해병대원들은 월미산 정상을 점령하고 [[UN기]]를 게양했다.<ref name=":10" /> 마운트 맥킨리 함에서 작전 상황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맥아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용문2|이제 끝났군. 내려가서 커피나 한 잔 하지.<ref name=":0" />{{Rp|251}}}}
 
=== 월미도 주민들이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발걸음을 돌리다 ===
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30여 가구 남짓한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돌아오려 했다. 1942년 '묵은마을'에서 이전해 올 때 월미산 기슭의 완만한 경사면을 7층으로 턱이 지게 깎아서 터를 마련한 뒤 집을 지은 해안마을은'해안마을'은 미군이 도저전차로 밀어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평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도민들은 사라진 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다른 폭격지와는 다르게 월미도는 폭격 후에도 미군부대가 그대로 주둔한 탓에 도민들은 월미도를월미도가 코앞에엎어지면 두고도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들어갈 수 없었다. 미군은 월미도와 인천을 잇는 다리를 철저히 봉쇄하였다. 결국 이들은 다리 입구에 있는 미군 부대 초소 옆 얼음 창고에서 지내다가, 근처에 판자촌을 지으면서 월미도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1952년 3월 주민들은 인천시장에게 처음으로 진정서를 냈는데, 이때 [[표양문]] 인천 시장은 "지금 미군이 저렇게 들어와 있으니 어쩌겠나. 걱정하지 마라. 미군이 나가면 다시 들어가 살게 해주겠다."라고 답했다. 이후 판잣집 마을은 200가구까지 불어났으나 80년대에 개발로 강제 철거되고 만다.<ref name=":0" />{{Rp|260-267, 269}}
 
한국전쟁 때 폭격당한 사람들은 월미도민 말고도 많다. 그런데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은 여타 폭격과 좀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집이 폭격되어도 그 자리로 돌아가 새로 시작할 수 있었는데, 미군은 월미도 주민들의 집터 자체를 빼앗았다. 하물며 일본조차도 1904년 월미도를 군사기지로 만들 때 섬 북쪽에 있는 마을을 강제 철거했지만 동쪽에 살 자리를 따로 내주고, 1942년 선착장을 지으려고 그 마을을 헐 때도 다시 집터를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미군은 군사기지만 짓고 주민들은 나몰라라 했다외면했다.<ref name=":0" />{{Rp|268}}
 
==== 미군이 물러가자 한국군이 들어오다 ====
 
=== 도민들이 귀향대책위를 꾸리다 ===
[[파일:월미공원 입구 옆에 위치한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 농성장.jpg|섬네일|800x800픽셀500x500px|월미공원 입구 옆 귀향대책위원회 농성장. 2004년 10월 7일 첫 농성을 시작으로 매일 회원들이 순번을 정해 농성장을 지켰다. 처음에는 열두 시간씩 교대로 밤낮없이 농성했지만, 현재는 하루 한 명이 주간에 농성을 하고 있다.|대체글=월미도민들이 2004년부터 지금까지 농성을 하고 있는 월미공원 입구 옆 귀향대책위원회 농성장.]]
국방부와 인천시 등에 계속 진상규명, 배상, 귀향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넣던 도민들은 1997년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2001년 해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도민들은 다시 귀향할 기대에 들떴다. 그러나 국방부가 주민과는 의논 한 번 없이 마을 부지까지 모두 인천시에 팔았고,팔아버린 데 이어 인천시가 거기에 공원을 조성하겠다고 계획을 발표하여발표함으로써 도민들은 또다시 국민의 피해를 외면하는모른 척하는 정부와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들은 2004년 10월 17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월미공원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ref name=":0" />{{Rp|268-282}}
 
2005년 한인덕이 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귀향대책위원회는 고령의 도민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하루빨리 사과, 배상, 귀향을 쟁취하기 위하여 인천시청 앞 1인시위를 하는 등 적극적인 요구에 나섰고, 인천의 시민단체, 언론, 지자체, 일부 국회의원들이 차츰 월미도민 배상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 진실화해위원회가 배상 결론을 내리다 ====
2006년 4월 귀향대책위원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에 '진실 규명 결정', 즉 월미도민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피해는 국가가 책임을 지고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ref name=":0" />{{Rp|278-284}} 다음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정리한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진실규명결정서》의 '결정 요지'이다.{{인용문|1.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9월 10일 인천광역시 월미도 마을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집단희생되었다. 폭격은 리차드 루블(Richard W. Ruble) 제독의 해병항공단 제15항모전단 항공기들에 의해 월미도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병항공기들(VMF-214, 323)은 95개(tank)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하였다. 이 집중폭격으로 동쪽지역의 건물, 숲 등과 함께 민간인 거주지도 완전히 파괴되었다.<br>2. 본 사건의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정용구(鄭龍九) 등 10명이다. 실종자 및 남은 가족이 타지로 이동하여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100여 명까지로 추산된다.<br>3.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월미도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 하에서 발생했다. 당시 유엔군은 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했고 월미도는 인민군이 주둔했던 인천의 관문으로서 반드시 무력화시켜야 할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br>4. <ins>당시 미군은 월미도 동쪽에 민간인 집 주거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ins> 그러나 미군은 상륙작전에서 인민군의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자국 군인에게 큰 피해가 초래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모든 불확실성을 없애려는 작전 개념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또한 9월 13~14일 함포사격작전의 사전작업으로 인민군의 방어시설을 숨겨주는 은폐물을 없애려는 것이 폭격의 주요 목표였다. 따라서 미군은 다수 민간인 거주지를 포함한 월미도 동쪽 전체를 집중폭격했다.<br>5. 미군의 월미도 폭격에 한 군사적 필요를 인정하고 적을 기만해야 할 군사적 필요가 컸다고 하더라도, 폭격 이전 폭격지점 선정에서나 폭격 중 식별할 수 있었던 민간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월미도 폭격의 경우 그러한 노력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ins>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폭격하고 육안으로 식별가능한 고도에서 주민에게 기총소사까지 한 것은 국제인도법, 전쟁법의 민간인 면제규범에 의한 민간인 구별의 원칙,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 작전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ins><br>6. 월미도 주민들은 거주지가 인천상륙작전의 성패를 가름하는 핵심지역이 되면서 민간인 면제규범에 따른 보호도 받지 못하고 전쟁의 혹독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월미도는 군사기지가 되었고, 그에 따라 유족과 거주민은 50년이 넘도록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여 큰 고통을 겪고 있다 .<br>7. 진실화해위원회는 본 사건의 진실이 규명됨에 따라 한국정부에 미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본 사건의 피해에 대해 실질적으로 보상할 수 있는 방안과 함께 월미도 원주민들의 귀향 및 위령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을 비롯한 명예회복조치 등을 적극 강구할 것을 권고하였다.<ref>{{저널 인용
|제목=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 1-1
|성=대한민국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url=http://pasthistory.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
|날짜=2008년 8월 28일}}</ref>}}그러나 주민들은 아직도 배상을 받지 못했다. 2006년 [[한광원]] [[열린우리당]] 의원이 특별법을 발의했으나 '한국 전쟁 때 폭격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월미도 주민들에게만 배상을 하느냐'라는 논리에 막혀 입법이 무산되고, 진실화해위원회가 배상 결론을 내린 뒤에도 2012년 [[문병호]] [[국민의당]] 의원이 발의한 특별법은 계류, 폐기되었다. 2017년 3월 7일 [[안상수 (1946년 5월)|안상수]]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을 비롯해 인천 지역 여야 국회의원 10명이 공동 발의한 '월미도 군부대 설치에 따른 월미도이주자의 보상에 관한 법률안'도 2018년 9월 현재까지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이 법에 대해서 국방부는 여전히 '형평성이 맞지 않다'라며 배상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ref name=":0" />{{rp|283, 291}} 2013년 11월 14일에는 월미도 원주민들이 국가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서울고등법원은[[서울고등법원]]은 국가승소(확정) 판결을 내렸다.{{refn|1948년 12월 19일 공표된 대한민국 정부의 '귀속재산처리법'에 따라 월미도 주민들이 거주지를 매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절차가 복잡해 지연되던 차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인천상륙작전 직후부터 미군에 의해 폐쇄되었기 때문에 월미도민들은 주거 사실을 입증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소유권이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피해 보상을 해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ref name=":0" />{{rp|291}}|group="주"}} 그런 와중에도 귀향대책위원회의 고령 회원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한인덕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려고 월미도 폭격을 한 것은 이해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을 모른 척 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인용문2|대한민국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해를 한다 이거야. 국가가 먼저니까 이해를 하지만, 희생당한 국민의 삶과 귀향 문제는 해결해줘야 하지 않나요. (중략) 그런데 과거는 과거다, 나는 모른다는 식으로 하면 어떻게 이게 국민을 위한 정부냐 이거죠. (중략) 강제로 불 지르고 내쫓아 버리고는 그게 무슨 소리야. 비유를 하자면 내게 자식이 있는데 자식을 두들겨 패서 내쫓아버린 거예요. 그리고 집에 못 들어오게 문 잠가버린 거야. 똑같은 거잖아요. 자식이 바깥에 나가서 잘 살면서 엄마 그리워하지도 않고 문 열어 달란 말도 안 하면 괜찮은데, 62년 동안 '엄마 문 좀 열어줘, 문 좀 열어줘' 하는 거랑 똑같다는 거지. 국가는 '나는 너 안 봐. 몰라' 그러는 거고.<br>-한인덕 구술<ref name=":0" />{{Rp|279-280}}}}
[[파일:2010.9.15 인천상륙작전 제60주년 기념 재연행사 (7445967332).jpg|대체글=국방부가 주최한 인천상륙작전 제60주년 기념 재연행사. 2010년 9월 15일.|왼쪽|섬네일|국방부가 주최한 인천상륙작전 제60주년 기념 재연행사. 2010년 9월 15일.]]
국방부에서는 매년 9월 '인천상륙작전 승전 기념식'을 주최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월미도의 유가족들과 주민들이 매년 9월에 '월미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ref name=":0" />{{Rp|278-286}} 수많은 정치인들이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에 참석했지만, 지금까지 위령제를 방문한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의 그림자는 이렇게 잊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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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설 ==
[[파일:월미관광특구 캐릭터 월디.jpg|대체글=월미관광특구 캐릭터 '월디' 조각상.|가운데|섬네일|1000x1000픽셀|월미관광특구 캐릭터 '월디']]
 
=== 월미공원 ===
==== 월미문화관 ====
[[파일:월미공원 월미문화관.jpg|대체글=월미문화관 입구.|왼쪽|섬네일|400x400픽셀|입구]]
[[파일:월미문화관 궁중의상체험.jpg|대체글=월미문화관 궁중의상체험실.|섬네일|400x400픽셀|궁중의상체험실]]
월미문화관의 1층은 전통문화전시관으로 생활문화전시실, 궁중문화전시실, 기획전시실로 꾸며졌다. [[관혼상제]], [[서당]]과 [[향교]] 같은 교육과정, [[종묘 제례악]] 등 궁중음악과 궁중음식, 왕의 [[경연]]과 일과 등을 볼 수 있다. [[한복]] 입어보기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전통혼례복과 왕가의 궁중복식, 신발과 가채 등이 준비되어 있다.
 
 
=== 월미 문화의거리 ===
[[파일:문화의거리 동상.jpg|대체글=문화의거리 동상.|섬네일|620x620픽셀|밤에도 나의 연주는 멈추지 않는다.]]
월미 문화의거리는 회센터와 카페가 즐비했던 월미도의 해안인접도로를 차없는 도로로 바꾸고 새단장하여 1989년 7월 2일 개장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2342498|제목=월미도 해안도로「문화의 거리」로새롭게 꾸민다|성=|이름=|날짜=1989-07-01|웹사이트=중앙일보|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18-12-09}}</ref> 별빛·수경·이벤트 광장과 전망대, 휴식·테마 공간 등 직접 해양을 접할 수 있다. 문화거리를 걷다 보면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들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엠넷]]의 디지털 채널 M2의 노래방 오디션 프로그램 《불토엔 혼코노》 4차 예선을 위한 코인노래방 상자가 문화의 거리에 설치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url=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485520|제목=‘불토엔 혼코노’ 4차 예선, 5일 인천 월미도서 개최|날짜=2018년 5월 4일|뉴스=텐아시아|확인날짜=2018년 12월 12일}}</ref>
[[파일:월미문화의거리 분수대.jpg|대체글=월미문화의거리 친수공간 분수대.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고 있다.|왼쪽|섬네일|친수공간 분수대]]
[[파일:문화의거리 동상야외 공연장.jpg|대체글=문화의거리 동상.야외 공연장|섬네일|620x620픽셀|밤에도야외 나의 연주는 멈추지 않는다.공연장]]
중앙에는 공유수면 5,667㎢를 매립하여 조성한 '친수공간'이 있다. 친수공간은 인천대교와 서해바다의 경관을 활용한 휴게 및 문화 이벤트 공간이다. 친수공간에는 '월미달빛 음악분수', 낙조전망대, 구름언덕, 조석체험시설 등이 있고, 친수계단으로 내려가면 출렁이는 바닷물을 직접 만질 수 있다.
[[파일:문화의거리 야외 공연장.jpg|대체글=문화의거리 야외 공연장|왼쪽|섬네일|야외 공연장]]
[[파일:문화의거리 끝 등대.jpg|대체글=문화의거리 끝에 자리한 등대|섬네일|문화의거리 끝에 자리한 등대]]
월미 문화의거리는 회센터와횟집과 카페가 즐비했던 월미도의 해안인접도로를 차없는 도로로 바꾸고 새단장하여 1989년 7월 2일 개장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2342498|제목=월미도 해안도로「문화의 거리」로새롭게 꾸민다|성=|이름=|날짜=1989-07-01|웹사이트=중앙일보|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18-12-09}}</ref> 별빛·수경·이벤트 광장과 전망대, 휴식·테마 공간 등 직접 해양을 접할 수 있다. 문화거리를 걷다 보면 다양한 볼거리, 먹을거리들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 [[엠넷]]의 디지털 채널 M2의 노래방 오디션 프로그램 《불토엔 혼코노》 4차 예선을 위한 코인노래방 상자가 문화의 거리에 설치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url=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485520|제목=‘불토엔 혼코노’ 4차 예선, 5일 인천 월미도서 개최|날짜=2018년 5월 4일|뉴스=텐아시아|확인날짜=2018년 12월 12일}}</ref>
문화의 거리를 깊숙이 들어가면 종이학 모양 야외무대가 바다를 등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구나 대관 신청만 하면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ref name=":11" />
 
중앙에는 공유수면 5,667㎢를 매립하여 조성한 '친수공간'이 있다. 친수공간은 인천대교와 서해바다의 경관을 활용한 휴게 및 문화 이벤트 공간이다. 친수공간에는 '월미달빛 음악분수', 낙조전망대, 구름언덕, 조석체험시설 등이 있고, 친수계단으로 내려가면 출렁이는 바닷물을 직접 만질 수 있다.
=== 월미전망대 ===
[[파일:월미전망대.jpg|대체글=월미전망대 외관|왼쪽|600x600픽셀|외관]]
[[파일:전망대 경치.jpg|대체글=월미전망대에 올라섰을 때 보이는 경치.|섬네일|400x400px|경치]][[월미산]] 정상에 서면 인천항은 물론 맑은 날에는 영종도와 용유도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월미산정상광장, 예포광장, 월미전망대의 경치가 빼어나다. 근래에 높은 건물들이 많아져서 인천항을 바라보기에 적합한 장소가 거의 없는데 이곳에 오르면 인천항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파일:월미산 광장.JPG|대체글=월미산 광장 파노라마|섬네일|420x420픽셀|월미산 광장]]
정상에 있는 월미전망대에서는 인천항과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를 조망할 수 있다. 월미전망대의 원형계단을 올라가 전망대 꼭대기에 서면 밑으로는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서해바다와 인천항, 인천대교 연안 여객선터미널이 보이고, 고개를 들면 인천 시내와 자유공원이 보인다. 전망대에 있는 달빛마루 카페에서 커피 한잔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23m 3층 높이 유리전망대는 야간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데이트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월미산의 정상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셔틀버스인 물범카로 오르면 15분이 소요된다.<ref name=":11" />
 
문화의 거리를 깊숙이 들어가면 종이학 모양 야외무대가 바다를 등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구나 대관 신청만 하면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 있다.<ref name=":11" />
=== 월미전망대 ===
[[파일:전망대 경치월미전망대.jpg|대체글=월미전망대에월미전망대 올라섰을 때 보이는 경치.외관|섬네일왼쪽|400x400px450x450px|경치외관]][[월미산]] 정상에 서면 인천항은 물론 맑은 날에는 영종도와 용유도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월미산정상광장, 예포광장, 월미전망대의 경치가 빼어나다. 근래에 높은 건물들이 많아져서 인천항을 바라보기에 적합한 장소가 거의 없는데 이곳에 오르면 인천항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파일:전망대 경치.jpg|대체글=월미전망대에 올라섰을 때 보이는 경치.|섬네일|경치]]정상에 있는 월미전망대에서는 인천항과 [[서해]]의 아름다운 낙조를 조망할 수 있다. 월미전망대의 원형계단을 올라가 전망대 꼭대기에 서면 밑으로는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서해바다와 인천항, 인천대교 연안 여객선터미널이 보이고, 고개를 들면 인천 시내와 자유공원이 보인다. 전망대에 있는 달빛마루 카페에서 커피 한잔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23m 3층 높이 유리전망대는 야간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데이트 장소로 각광 받고 있다. 월미산의 정상까지는 도보로 약 30분, 셔틀버스인 물범카로 오르면 15분이 소요된다.<ref name=":11" />[[파일:월미산 광장.JPG|대체글=월미산 광장 파노라마|섬네일|420x420픽셀|월미산 광장]]
=== 한국이민사박물관 ===
[[파일:한국이민사박물관.jpg|대체글=한국이민사박물관 입구.|섬네일|400x400픽셀|입구|왼쪽]]
[[파일:한국이민사박물관 사진.jpg|대체글=한국이민사박물관 전시실.|왼쪽|섬네일|전시실]]
{{본문|한국이민사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은 한국의 이민사를 살펴보고, 선조들의 해외 활약상과 개척자적 삶을 기리고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2008년도에 개관하였다. 박물관에는 해외 한인들로부터 기증받거나 구입한 유물 4,4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박물관 전시실에는 당시 [[하와이]]로 떠났던 갤릭호 모형을 비롯해 선조들의 고달팠던,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냈던 지난날의 모습을 둘러볼 수 있다.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들의 길고 험난했던 여정, [[사탕수수]]농장의 고된 노동과 하와이에 정착하는 과정, 광복을 위해 몸 바쳤던 선열들의 활약상, 해외동포들의 근황과 염원을 4개의 전시실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ref name=":11" />
박물관 전시실에는 당시 [[하와이]]로 떠났던 갤릭호 모형을 비롯해 선조들의 고달팠던,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냈던 지난날의 모습을 둘러볼 수 있다.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들의 길고 험난했던 여정, [[사탕수수]]농장의 고된 노동과 하와이에 정착하는 과정, 광복을 위해 몸 바쳤던 선열들의 활약상, 해외동포들의 근황과 염원을 4개의 전시실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ref name=":11" />
 
=== [[놀이동산]] ===
[[파일:월미놀이공원_대관람차.jpg|대체글=월미테마파크의 대관람차.|왼쪽|프레임|월미테마파크의 대관람차|섬네일|481x481픽셀]]
놀이기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다 같은 회사 같지만 운영주체가 각자 다르다. 재미있게도 누리집 주소까지 헷갈리는데, 마이랜드의 주소는 [http://www.my-land.kr my-land.kr]이고 월미테마파크의 주소는 [http://my-land.co.kr my-land.co.kr]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