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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전주시|전주]]에서 대장군을 지낸 [[이양무]]와 상장군 이강제 [[삼척 이씨]]와의 사이에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그가 [[이양무]]의 장남이라 하고, 다른 설에 따르면 고려말 주부동정(主簿同正)을 지낸 이영습이 그의 형이라고도 한다.
 
처음에 [[전주]]에 살았는데, 기생 문제로 산성별감(山城別監)과 갈등을 빚고 [[삼척]]으로 이주하였으며(이안사는 이 지역의 한 관기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 고을 별감이 그 기생을 취했다. 그래서 화가 난 이안사는 별감에게 따졌고 싸움까지 일어났는데 문제는 이 별감이 고을 현감까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현감은 이 문제를 도지사급이었던 안렴사에게 알리는 바람에 이안사는 투옥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는 몽골과의몽고와의 전란기라 호족들은 스스로 집안과 재산, 인명을 지키기 위해 가병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안렴사는 이 가병 때문에 직접 체포하지 못하고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를 알게 된 이안사는 조정에서 미적거리는 사이에 집을 정리하고 가솔과 가병, 재산을 가지고 강원도 삼척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왜구]]와 [[원나라|원]]의 침략을 막아냈다. 산성별감이 [[안찰사]]로 임명되어 오자 다시 의주(宜州: 덕원, 현재의 [[원산]])로 이주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했는데, [[1254년]] 원의몽고의 산지(散吉, Sanji) 대왕이 조씨와 이안사를 회유하자 항복하였고, 개원로(開元路) [[훈춘 시|남경]](南京)의 오동(斡東, 알동<ref name="알동">[[함경북도]] [[경흥군]]의 [[두만강]] 맞은 편, 현재 한·중·[[러시아|러]] 접경인 [[중국]] [[지린성]] [[훈춘시]] 경신진(敬信鎭)</ref>)으로 이주하였으며끌려갔으며 조씨와 함께 [[1255년]] 오동천호소의 우두머리 오동천호(千戶)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되었다.
 
[[1274년]] 세상을 떠나 아들 [[조선 익조|이행리]]가 관직을 이어받았다. [[1392년]] [[음력 7월 28일|7월 28일]] [[조선 태조|태조 이성계]]에 의해 목왕(穆王)에 추봉되었다가 [[1411년]] [[음력 4월 22일|4월 22일]] [[조선 태종|태종]]에 의해 '''목조'''(穆祖)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에 재추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