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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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의 역사'''는 선사시대인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삼국시대]]에 [[미추홀]]이 있었다고 추정되며<ref>{{harvnb|김윤식 등|2006|p=43}}</ref>, [[삼국 시대]]에 [[고구려]]의 영토가 된 뒤로는 매소홀현(買召䑸䎱)으로 불리다가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경덕왕]]이 소성(邵城)이라 이름지었다.<ref name="삼국사기">김부식, 《삼국사기》 , 35권, 잡지 4, 지리 2, 신라조</ref> [[고려]] 시대에는 수도인 [[개성]]에 인접한 해안 지역으로서 해양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으며, 왕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오늘날 [[부평 (인천)|부평]]인 수주(樹洲)에 두었다. 안남도호부는 시흥, 양천, 통진, 김포, 그리고 원인천(原仁川)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소성현(邵城縣)이 속해 있었다.<ref name="오영태">{{harvnb|오영태|1994|p=28-29}}</ref> 소성현은 고려 왕실의 외척을 배출하여 계속하여 지위가 격상되었는데, [[고려 숙종]]대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고, [[고려 인종|인종]]대에는 인주(仁州)로, [[공양왕]] 대에는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었다.<ref>{{harvnb|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2003|p=48-51}}</ref> 그러나, [[조선]]이 개국한 후 [[조선 태조|태조]]는 다시 인주로 격하하였고, [[조선 태종|태종]]이 고을 사이의 서열을 정비하면서 인천으로 격하하여 오늘날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ref name="나채훈박한섭21">{{harvnb|나채훈 박한섭|2006|p=19}}</ref>
 
[[조선 세조|세조]] 5년 인천에 도호부를 두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ga_10511005_005&tabid=k 자성왕비의 외향인 인천군을 도호부로 삼다], 《세조실록》, 세조 5년 11월 5일</ref>[[병자호란]] 이후 [[조선 효종|효종]]은 강화도로 들어가는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해 제물진을 구축하였다.<ref name="나채훈박한섭34-35">{{harvnb|나채훈 박한섭|2006|p=34-35}}</ref> [[조선 숙종|숙종]] 때에 이르러 제물진 앞 월미도에 행궁을 설치하고 방어를 강화하였다.<ref name="숙종실록34">[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sa_13404021_001&tabid=k 부사용 민치대가 영종도보다 인천에서 방어하면 득책이 될 것이라는 상소를 올리다], 《숙종실록》, 숙종 34년 4월 21일</ref>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운요호 사건]]을 거치면서 인천은 외세와 직접 대면하는 곳이 되었다. [[제물포조약]]이후 6년이 지나 제물포가 개항되고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지와 서양 여러나라의 영사관이 제물포에 들어서게 되었다.<ref>{{harvnb|나채훈 박한섭|2006|p=75,85-86}}</ref> 그리고 관교동(문학동)에 있던 인천의 중심지가 개항에 따라 사실상 제물포로 옮겨지게 되었다. 제물포를 통한 교역 대상국은 청나라가 압도적이었으나<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2009|p=13}}</ref>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06년 인천 내항을 축조하여 항구를 확장하였고<ref>{{harvnb|윤대영|20110|p=46-47}}</ref>,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인천은 일제 식민 통치의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계속되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수산업단지의 역할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일본은 인천 곳곳의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해방 이후 ‘정명개정위원회’(町名改正委員會)가 구성되어 일본식 이름을 소거하였으나 지금도 만석동, [[송도국제도시|송도]]<ref group="주해">송도(松島)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측 순양함이었던 [[마쓰시마 (방호순양함)|마쓰시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ref> 와 같은 이름이 남아있다.<ref>{{harvnb|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2013|p=25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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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8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군이 인천을 통하여 상륙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은 [[한국 전쟁]]의 국면을 크게 전환하였다. 수세에 밀렸던 대한민국은 이 작전을 계기로 공세로 전환하여 북진할 수 있었다.<ref>{{harvnb|역사학연구소|2004|p=307}}</ref>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인천은 수도권의 주요 수출입 항만이 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됨에 때라 인천항은 계속하여 확충되었고, 인천 내항이 맞고 있던 역할은 북항, 연안부두, 남항 등지로 분산 이전되었다. 이로 인해 내항 앞에 형성되어 있던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교들은 경제 침체를 맞기도 하였다. 한편, 인천 각지에는 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오늘날 인천에 속한 행정구역은 근대 이전까지 전통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사를 갖는 여러 지방이 묶여 있다. 원래의 인천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부와 경기도 시흥시 북부 일대였고, 그 중심지는 인천도호부가 있던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남구미추홀구]] 남부(옛 인천도호부 부내면) 일대였고, 개항 이후 인천의 중심지는 제물포 지역으로 이동되었다. 이후 부평과 강화 등이 차례로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오늘날 인천은 8개의 구와 2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13년 기준 인구는 약 293만명이다.<ref>[http://www.incheon.go.kr/app/ebook-102 2013년 인천통계연보], 인천광역시</ref>
 
==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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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 ==
 
{{인용문|[[파일:Neungheodae site.JPG|섬네일|left왼쪽|150px|능허대터]] 沸流欲居於海濵, 十臣諌曰惟此河南之地北帶漢水東據髙岳南望沃澤西阻大海其天險地利難得之勢作都於斯不亦冝乎. 沸流不聽分其民歸弥鄒忽以居之. 温祚都河南慰禮城以十臣爲輔翼國號十濟 <br /> 비류는 바닷가에 머물고자 하였다. 십신이 오히려 이 하남의 땅이 북으로 한수를 마주하고 동으로 높은 산에 닿고 남쪽으로는 물이 풍부하며 서쪽으로는큰 바다를 비껴서서 그 천험한 땅을 다시 얻기는 어려우니 그곳에 도읍을 정하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간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 자리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신이 보좌하니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1권〉<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g_023r 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 제1], 국사편찬위원회</ref>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와 함께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을 하였다고 하며, 삼국사기의 지리지에서는 미추홀의 위치가 인천이라고 밝히고 있다.<ref name="삼국사기" /> 미추홀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동사강목]]》에서는 문학산성 인근으로 추정하고 있다.<ref>《동사강목 제1상》〈계묘년 마한 신라 시조 40년, 고구려 유리왕 2년, 백제 시조 부여온조(扶餘溫祚) 원년 ○ 이로부터 3국이 되었다(한 성제 홍가 3년, 서기 기원전 18년)〉의 미추홀 각주 - 지금의 인천(仁川)이다. 세속에 전해오기를, 문학산(文鶴山) 위에 비류성의 터가 있고 성문의 문짝 판자가 지금도 오히려 남아 있으며, 성안에 비류정(沸流井)이 있는데 물맛이 시원하다.’고 한다. 《여지승람》에 실리지 않아 한스럽다.</ref> 미추홀이란 이름은 물가에 있는 지역을 뜻하는 뭇골, 또는 거친 들판이 있는 지역을 뜻하는 맷골의 음차라는 해석이 있다.<ref>[http://m.grandculture.net/contents.aspx?use=&lc=GC047&ct=A&ctid=A00005&contid=GC04700355 미추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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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하류 유역과 인천 지역은 [[백제]]가 중국과 교류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백제는 대중국 교역과 소금, 철과 같은 중요한 교역품을 생산하고 확보하기 위해 왕성에서 가장 가까운 서해안 일대를 개척하였다. 백제 시기의 주요 산성으로는 계양산성과 문학산성이 알려져 있다. 인천 계양산성은 2009년까지 4차 발굴조사가 실시된 바 있다. 계양산 너머에 있는 공촌동, 검안동 지역은 고려 때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지역으로 고대의 소금 산지였을 것이다. 백제는 소금을 계양산 장명이 고개를 넘어 한강으로 운반하여 수로를 이용하여 위례성까지 운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계양산성에서는 100여점의 명문(銘文)이 발굴되었다. 문학산성 서쪽의 능허대(凌虛臺)는 중국과 교역을 위한 항구로 쓰였다. 문학산성에서 시작된 교통로는 광명 소하리를 거쳐 안양천을 이용하여 위례성에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ref>[http://gyeore.or.kr/images/SUBS_LAYOUT_000/data/download/data_4030/data_02_02.pdf 한강하류 고대 교통로에 대한 검토], 겨레문화연구 제2호, 2013년</ref>
 
오랫동안 백제의 주요 거점이었던 인천지역은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밀리면서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 고구려는 미추홀을 점령하고 매소홀현을 세웠다.<ref name="삼국사기" />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절치부심하였으며, [[신라]]와 [[나제 동맹|연합]]하여 마침내 고구려를 몰아내었다. 그러나, [[진흥왕]] 14년(553년)에 신라는 한강하류의 6군을 백제로부터 탈취한 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을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ref>《이야기 한국역사 1》, 풀빛, 2013년, {{ISBN|8974748185}}, 204쪽</ref> [[경덕왕]]은 매소홀현의 이름을 소성으로 변경하였다.<ref name="삼국사기" /> 신라는 능허대를 포기하고 [[당항성]]을 중국 교류의 창구로 이용하였다.<ref name="인하대학교박물관" />
 
== 고려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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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정조]]와 [[조선 순조|순조]] 시기의 박해 이후 조선은 천주교를 엄금하고 있었으나, [[조선 철종|철종]] 시기 [[세도정치]] 세력가들은 천주교에 관대한 편이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베르뇌 주교]], [[펠릭스클레르 리델|리델 신부]] 등 [[예수회]] 선교사를 보내 포교를 하였다. 그러나, [[조선 고종|고종]] 3년(1866년) 조선은 다시 천주교를 억압하기 시작하였고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하였다. 프랑스는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을 빌미로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 상륙하여 정족산성과 강화읍성을 공격하여 많은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정족산성에서 [[양현수]]가 이끄는 총병의 공격을 받은 프랑스군은 더 이상 교전은 불리하다는 판단아래 철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ref>김육훈,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후마니스트, 2013년, {{ISBN|9788958621768}}, 31-33Whr</ref>
 
[[파일:Interior of Fort McKee., 06-1871 - NARA - 559259.tif|섬네일|left왼쪽|신미양요 당시 광성보에서 전몰한 조선군]]
[[신미양요]]는 [[1871년]] [[6월 10일]]([[조선 고종|고종]] 8년 [[음력 4월 23일]])에 발생한 [[조선]]과 [[미국]] 간 전쟁이다.<ref>정연선 외, 《한국에서의 미국학 이론과 실제》,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5년, {{ISBN|8974643294}}, 198쪽</ref> 미국은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조선의 주요 수로였던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염하]]를 거슬러 올라왔고 조선 측의 거부를 무시하고 탐침을 시도하여 교전이 일어났다.<ref name="역사연구소25">역사연구소,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13년, {{ISBN|9788978432087}}, 25쪽</ref> 3일간의 교전 결과 조선은 [[광성보]]가 함락되고 순무중군 [[어재연]]을 비롯한 수비 병력 대다수가 사망하였다. 미해군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하였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ref>이광희, 《한국사를 뒤흔든 20가지 전쟁》, 씽크하우스, 2007년, {{ISBN|8901063093}}, 133쪽</ref> 신미양요는 미군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결사 항전하여 이양선을 몰아낸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일본이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였다.<ref>김육훈,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후마니스트, 2013년, {{ISBN|9788958621768}}, 35쪽</ref> 미국은 참전한 9명의 수병과 6명의 해병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하였다.<ref>[http://www.history.army.mil/html/moh/korean1871.html Korean Campaign 1871 Medal of Honor Recipients]</ref> 미국 아시아함대는 1865년 동인도-중국 함대가 개편되어 설립된 것으로 신미양요는 아시아함대의 첫 전투였다. 미국의 이러한 함대 재편과 조선 침공은 미국도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려는 정책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외 팽창 정책은 별다른 성과 없이 조선의 배외 감정만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ref>서해문집, 《내일을 여는 역사》 통권 13호, 2003년, {{ISBN|8974831880}}, 6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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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진압을 구실로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 역시 조선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두 나라의 군대는 인천 앞 바다의 [[풍도해전]]을 시작으로 [[청일전쟁]]을 벌였고,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한 뒤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에 이르기까지 전선이 확대되었다. 일본은 대외적으로 청의 부당한 간섭에 대해 조선의 독립을 지원한다고 선전하였지만, 속내는 조선을 자신들의 종속국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다. 8월 17일 일본 정부는 “한국을 명의상 독립국으로 공인하지만, 대일본제국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원히 또는 장기간 그 독립을 도와주고 타국으로부터의 수모를 막아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이는 사실상 조선을 일본의 종속국으로 삼겠다는 결정이었다.<ref>나카쓰카 아키라, 김승일 역, 《근대 한국과 일본》, 범우사, 1995년, {{ISBN|8908020543}}, 76-79쪽</ref>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그리고 [[펑후 제도]]를 할양받는 한편,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서구 열강은 [[삼국 간섭]]을 통해 일본을 압박하여 랴오둥 반도를 다시 중국에 반환하도록 하였다.<ref>{{harvnb|강창일|2008|p=107 - 108}}</ref> 일본은 삼국 간섭을 수용하면서도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국력의 문제로 귀착된다. 국력이 다른 나라의 간섭을 물리칠 수 있다면 어떠한 굴종도 감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며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멈추지 않았다.<ref>{{harvnb|한상일|2006|p=93}}</ref>
 
[[파일:Battle of Chemulpo.jpg|섬네일|left왼쪽|러일전쟁 당시 제물포 해전에서 침몰하는 러시아 군함]]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욕은 결국 러시아의 제국주의와 충돌을 빚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무력충돌 조짐을 보이자 조선 정부는 서둘러 중립국을 선언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1904년]] [[2월 8일]] [[뤼순]]과 인천에서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전쟁을 시작하였다. [[제물포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였고, 조선 정부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한반도를 전장으로 만들었다.<ref>나카쓰카 아키라, 김승일 역, 《근대 한국과 일본》, 범우사, 1995년, {{ISBN|8908020543}}, 98-99쪽</ref> [[러일전쟁]]은 1905년 까지 계속되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사할린을 할양받는 한편,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우월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 결과 1905년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빼앗았다.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외교관과 기독교 선교사를 포함한 대다수의 서구인들은 일본이 조선에서 이른바 “근대화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였다.<ref>{{harvnb|부르스 커밍스|2001년|p=201-206}}</ref>
 
=== 조계지의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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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에 세워진 오늘날 [[중구 (인천광역시)|인천 중구]]의 중앙동, 송학동, 송월동, 북성동 등 개항장을 중심으로 약 15만 여평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청나라|청]]과 [[일본]]의 조계지 외에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사용하여 조선 감독관의 통제를 받는 각국조계(各國租界, 만국조계라고도 하였음)와 조선인의 거주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1885년 당시 외국 조계에는 146 채의 주택이 있었고, 조선인 거주구역의 주택은 120 채로 오히려 적은 규모였다. 조계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여 1897년 외국인의 인구는 4,374명이 되었다. 이에 따라 땅값도 크게 뛰어 1884년 100 [[제곱미터|m²]] 당 6 달러 수준이던 땅값은 1888년 60 달러로 치솟아 올랐고, 1893년 무렵엔 240 - 300 달러까지 올랐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2007|p=15-31}} - 〈Korean Repository〉1897년 10월호 pp. 374-384를 번역</ref>
 
일본조계는 오늘날 중구 관동과 중앙동 일대로 1883년 〈인천항일본거류지차입약정서〉를 근거로 약 23,140 m²가 설정되고, 1884년 약 12,560 m²를 확장한 것을 비롯하여 꾸준히 조계지를 확장하였다. 청국조계는 1884년 4월 2일 채결된 〈인천구화상조계장정〉을 근거로 설정되었으며 오늘날 중구 선린동 일대에 약 16,530 m² 규모로 조성되었다. 1884년 10월 3일 〈인천제물포각국공동조계장정〉이 채결되어 일본과 청나라를 제외한 여러 나라의 공동 조계가 설정되었다. 각국조계의 총면적은 647,107 m²로 광대하였으나 그 대부분은 훗날 [[자유공원|만국공원]]이 들어서게 되는 산지였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2008|p=71-73}}</ref>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은 후인 1913년 4월 각국조계지가 폐지되었고, 같은 해 11월 청국조계지가 폐지되었다. 이로서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의 인천유입은 거의 없게 되었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2008|p=81-8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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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amen de Tchemoulpo pictured by Charles Varat.jpg|섬네일|1888년 촬영된 인천감리서(제물포 소재)]]
 
경인선은 한국 최초의 철도이다. 1891년 미국의 기업가 제임스 모스가 미국 공사 [[호러스 뉴턴 알렌|알렌]]을 통하여 조선 정부와 철도부설을 협의하였으나, 일본이 개입하여 일본의 자본으로 철도를 부설하는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을미사변]]으로 일본을 배척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철도 부설권은 다시 모스에게 넘어갔다.<ref>{{harvnb|이회한|2008|p=60}}</ref> 모스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여받은 직후, 인천에 거주하는 같은 미국인 타운센드(W. D. Townsend)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콜브란(Henry Collbran)을 기사장으로 하여 경인간 노선을 실측하였고, 1897년 3월 27일에 인천 우각현(쇠뿔고개, 오늘날 도원고개)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다.<ref>{{harvnb|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2003|p=153}}</ref> 모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철도 부설 자금을 모집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철도부설권은 결국 일본 자본이 모여 만들어진 경인철도합자회사에 팔렸다.<ref>{{harvnb|나채훈 박한섭|2006|p=135-136}}</ref> 1899년 9월 18일 인천역 ~ 노량진역 간 33킬로미터 구간이 개통되었다. 당시 개통된 역은 인천 - 축현 - 우각동 - 부평 - 소사 - 오류동 - 노량진의 7개 역이었다.<ref name="나채훈박한섭137">{{harvnb|나채훈 박한섭|2006|p=137}}</ref>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개통되었고 사흘 후인 7월 7일 [[서울역]]까지 연결되어 서울-인천간 철도 교통이 완성되었다.<ref name="고종석">고종석, 《히스토리아》, 마음의산책, {{ISBN|8989351383}}, 278쪽</ref> 경인선은 개통초기 하루 2회 왕복하였으나 전구간이 개통되면서 하루 5회 왕복 운행되었다.<ref name="나채훈박한섭137" />
 
[[파일:A model of train to run Gyeongin line at 1897.JPG|600px|섬네일|center가운데|경인선 초기에 운행된 [[모가형 증기 기관차]]의 모형.]]
 
제물포에 제일 처음 도입된 근대적 통신은 [[전신]]이다. 청나라는 조계지와 본국간의 연락을 위해 전신을 설치하였다.<ref name="ReferenceA"/> 한편, [[전화]]는 조선의 필요에 의해 개설되었는데, 조계지역을 관장하는 인천감리서와 조정사이의 연락을 위해 가설되었다. 한국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청나라에 파견된 유학생 상운이 1882년 3월 제물포항으로 귀국하면서 가져온 것이 시초이나, 실제 통화를 위해 개설된 것은 1898년 무렵으로 보인다. 가장 오래된 통화 기록은 1898년 1월 28일 인천 감리가 외아문(外衙門)에 “오후 3시에 영국 범선 3 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보고한 것이다. 일반인이 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으로 일본이 서울-인천 간 전화를 불법으로 가설하려하자 조선이 서둘러 사업을 시작하였다.<ref>{{harvnb|조우성|2004|p=56-5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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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ngineering work built Incheon port at 1906.jpg|섬네일|인천항 축항 공사]]
 
제물포는 조선 시대 중기 이후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고, 개항 이전에 이미 진과 마을을 구성하고 있었다. 훗날 일제는 개항 이전의 제물포가 “갈대가 우거진 한적한 포구에 불과했다”며<ref>《[http://www.incheon.go.kr/ebook/pdf/2004_12_6.pdf 역주 인천 개항25년사]》,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04년, 13쪽</ref> 개항을 말미암아 크게 발전하였다고 자랑하였으나 이는 자신들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ref>{{harvnb|조우성|2004|p=23}}</ref> 그러나, 개항초기 제물포는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고 갯벌이 발달하여 큰 선박이 통행하기에는 불편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인천항은 여러 차례 규모를 확장하여 방조제를 만들고 항만을 정비하였다. 1906년 전국 각 항구의 항만시설 개선이 필요하게 되어 실지조사를 시행하였고, 이 조사에 기초해 인천항을 비롯한 전국 10개 항에 대한 항만시설개선계획이 수립되었다. 인천항은 6개년 계획으로 진행되었는데 도중에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병탄되어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사업을 계속하여 1912년 5월 완공하였다.<ref>{{harvnb|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2003|p=105-152}}</ref>
 
인천항을 통한 물자의 수입은 개항 초 대일 수입이 압도적이었으나 곧바로 대중 수입이 가파르게 늘어나 청일전쟁 이전인 1892년에는 전체 수입량의 56%를 점하게 된다. 이는 청조계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동순태 등의 화상(華商)들이 주도하였다. 동순태는 1920년대 까지도 국세 납부자 1위를 기록하는 주요 무역업자였다.<ref>{{harvnb|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2013|p=184-185}}</ref> 청일전쟁 이후 조선과 청의 무역조약인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무효화 되면서 대중국 무역은 급감하게 되었고 많은 화상들이 중국으로 돌아갔다. 아울러 경인선의 개통으로 화상들 상당수가 서울로 이전하여 인천의 중국인 거류자는 일시적으로 급갑하였으나, 이후 대중국 무역은 완만한 회복세를 보여 1902년 무렵엔 인천항 수입액 중 43%에 이르게 되었다.<ref>{{harvnb|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2013|p=187-190}}</ref> 개항기 일본은 인천보다는 자국과 가까운 부산에 더 많은 거류자가 있었으나 인천에서도 차츰 인구가 상승하여 1904년에는 부산과 대등한 규모로 확대되었다.<ref>{{harvnb|이준한·전영우|2007|p=48-4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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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산업 ====
 
개항과 함께 해외 무역이 시작되자 [[세관]] 업무를 위해 해관(海關)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해관은 개항장을 통하여 거래되는 품목에 대해서만 관리가 가능할 뿐이었고, 다른 포구들을 이용한 밀무역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당시 밀수입 품목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소금]]이었다. 이 외에도 [[비단]], [[명주]], [[갈치]] 등이 밀수입되었고, 반대로 곡물이 밀수출되었다. 당시 조선은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자염(煮鹽)을 생산하고 있었는데 생산량이 많지 않아 비쌌다. 청나라나 일본에서 밀무역된 천일염은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쌌기 때문에 많이 팔렸다.<ref>{{harvnb|유승훈|2012|p=174-175}}</ref> 1907년 인천 주안에 천일염전이 생겼다. 이후 한반도 서해안 전역으로 확대된 염전의 시범 사업 성격을 갖는 주안 염전은 일제 통감부가 주도한 대한제국의 주요 국책사업이었다. 주안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은 1900년 개통된 [[경인선]]을 통해 서울로 수송되었다.<ref>{{harvnb|유승훈|2012|p=182-188}}</ref>
 
개항장을 통해 들어온 [[자본주의]]는 새로운 산업과 함께 새로운 경제 관계도 형성하게 하였다. 인천을 비롯한 각 개항장에서는 무역량의 증가에 비례하여 부두노동자가 늘었다. 부두노동자는 조선에 이미 존재하였던 광산노동자나 수공업노동자와 달리 대부분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완전히 상실한채 자본가인 화주(貨主)에게 받은 임금만으로 생활을 유지한 완전한 형태의 임금노동자였다. 부두노동자는 점차 늘어 1910년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7만여명의 날품팔이꾼이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철공장, 연초공장과 같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이 곳에 근무하는 노동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다.<ref>이상의, 《일제하 조선의 노동정책 연구》, 혜안, 2006년, {{ISBN|89-8494-272-3}}, 26-2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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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 ===
[[파일:이승만과 박용만.jpg|섬네일|left왼쪽|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 선 박용만과 이승만]]
 
개항 이후 조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증가하는 사이 한국에서도 새로운 삶을 찾아 이민을 하는 일이 생겼다. 인천항에서 배에 올라 [[하와이]]와 [[멕시코]]로 이민을 떠난 한국인들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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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 처음 도착한 이민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사탕수수 농장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일했다. 처음에는 몇 년만 일하고 돌아갈 줄 알고 온 경우도 많았다. 이 때문에 결혼이 사회문제가 되어 조선에서 사진을 보내오면 그것을 보고 결혼하는 사진결혼이 이루어졌다.<ref>{{harvnb|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p=32-33}} (상권)</ref> 하와이에 뿌리내린 한국이민자들은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였고, 후일 일제강점기에 국권이 상실되자 저임금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독립자금을 모으고 군사훈련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ref>{{harvnb|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p=30-31}} (상권)</ref>
 
한편, 1905년 멕시코 이민은 영국인 메이어스(John G. Meyers)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멕시코 농장주들과 동양인 이민을 계약하고 중국과 일본에서 이민을 모집하였으나 실패하자 한국에 와서 대륙식산회사(大陸植産會社)를 경영하던 일본인 다이쇼(大庭貴一)와 공모하여 한국인 이민을 모집하였다. 메이어스는 하와이 이민에 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이민을 모았으나, 실은 거짓 약속이었고 궁극적으로는 4년 계약으로 노동자를 멕시코 농장주들에게 팔아 넘기는 형식이었다. 1905년 3월 6일 1,033명의 이민자가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로 향했다. 멕시코의 [[용설란]] 농장에 도착한 이들은 토굴에 살면서 살인적인 노동을 감내하여야 하였다.<ref name="문호개방과인천사회_170174" />
 
== 일제 강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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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이른바 [[만주 사변]]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반도의 산업 정책을 재편하여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은 송림동, 창영동, 도원동 서쪽의 항만지대에 한정된 6.05&nbsp;km<sup>2</sup>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부평군과 통합되어 부천군이 되었으나 공업화 추징으로 관할지가 확대되게 되었다. 1940년 2차 관할구역 확장 결과 인천은 부평군의 대부분을 흡수하여 그 면적이 165.82&nbsp;km<sup>2</sup>에 달하게 된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2006|p=9-10}}</ref> 일제는 인천의 공업화를 위해 전력수급계획을 마련하였고 군수 물자로 사용하기 위한 방적산업을 집중 육성하였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2006|p=11}}</ref> 1934년 인천시 만석동에 동양방적주식회사가 인천공장이 세워졌다. 일제시대부터 운영되던 이 공장은 1955년 민영으로 넘겨져 동일방직 주식회사가 되었고 1970년대 가혹한 노동탄압으로 세상에 알려졌다.<ref>{{harvnb|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p=264-267}} (상권)</ref><ref>한상철, 《내가 쓰는 한국 근현대사》, 우리교육, 2011년, {{ISBN|8980409400}}, 280쪽</ref>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제는 부평에 일본육군조병창을 세웠다. 1930년~40년대 사이 인천공업지대에 건설된 주요 공장들은 동양방적, 조선목재, 일본제분 등 3개 공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수산업에 속하는 공장들이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2006|p=12}}</ref> 1940년대 당시 인천에는 섬유공업 4 개소, 기계금속공업 26 개소, 화학공업 3 개소, 제재업 6 개소, 식료품 공업 47 개소, 기타제조업 51개소 등 137 개의 공장이 있었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2006|p=115-16}}</ref>
 
==== 수인선 ====
1937년 조선경동철도회사가 인천 일대의 소금 수송을 목적으로 협궤 철도 노선인 [[수인선]]을 부설하고, 1937년 8월 6일 남인천역에서 수원역까지 영업을 개시하여 경기도 여주, 이천 지역의 쌀과 인천의 소래, 남동 등지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반출하였다.<ref>{{저널 인용|제목=일제시기 철도망의 시공간적 확산|저자=김종혁|저널=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학술대회 철도를 통해서 본 근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연도=2013}}</ref> 수인선은 협궤(궤간 거리 762&nbsp;mm)로서 객차 길이는 14.7 m, 폭은 2.15 m 로 좌석수가 50 석에 정원은 90 명이었다. 초기 운행 당시 운행속도는 시속 약 20 km로 기차가 작고 가벼워 덤프트럭과 충돌사고로 탈선한 일도 있었다. 수인선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되다 1995년 폐선되었다.<ref>{{저널 인용|제목=경인선 표준궤간 철도와 수인선 협궤 철도 개설에 따른 인천지역의 사회적, 기술적 충격에 관한 연구|저자=박보용|저널=교수논총|권=2권|호=2호|연도=2003|url=http://isi.or.kr/data/b_pfs/gyosu2_1_41.pdf}}</ref> 2012년 오이도 - 송도 구간이 도시철도로 재 개통되었다.<ref>[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57846 수인선 재개통], 인천일보, 2012년 05월 11일</ref>
 
=== 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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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운동 ===
[[파일:Women working in a rice mill factory at Incheon ruled by Japanese at 1920s.jpg|섬네일|left왼쪽|1920년대 인천 정미소의 여성 선미공]]
일제는 회사령을 발표하여 조선에 일본 자본을 유치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는 가운데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조선에 유치하였는데, 총독부는 “조선 산업정책의 기본은 본국인 일본 제국의 산업정책과 관련하여 협조”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의 산업 구조를 보완하는 정책을 폈다. 이 때문에 노동자를 보호하는 정책은 기대할 수 없었고, 노동자의 요구는 철저히 억제되어야 하였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회 위원 가타 나오하루(賀田直治)는 일본 자본의 투자 유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의 장점으로 임금이 저렴하며, 언어습득이 빠르고, 파업을 일으킬 능력이 부족하고, 일본 공장법의 범위 밖에 있으므로 하등의 지장 없이 일을 시킬 수 있다는 것 등을 들었다.<ref>이상의, 《일제하 조선의 노동정책 연구》, 혜안, 2006년, {{ISBN|89-8494-272-3}}, 54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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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상 ===
[[파일:Wolmi beach at 1924.jpg|섬네일|1920년대 월미도 해수욕장]]
1923년 남만주철도회사 경철국(京鐵局)이 13만 엔의 경비를 들여 월미도에 3천명 수용 규모의 해수조탕(海水汐湯)을 짓고 관광지를 조성하였다. 월미도와 육지를 콘크리트 도로로 연결하였고, 유원회사를 차려 자본 30만 엔으로 약 7,00평의 땅 사들여 여관, 임대별장, 간이식당, 매점 등을 차리고 월미도 북쪽과 남쪽에 해수욕장을 개설하였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2009|p=30-31}}</ref> 1920년대에 들어 여름이면 납량열차가 운행되어 수 많은 인파가 월미도로 밀려들었다. 1930년에는 송도에 유원지가 추가로 건설되었다.<ref>{{harvnb|이회한|2008|p=195-197}}</ref> 1930년대 월미도는 서울 인근의 대표적인 휴양지였다. 비행사 [[장덕창]](張德昌)이 수상 비행기를 몰고 와 소월미도 해상에 내려앉아 전국적인 화제를 낳기도 했다. 월미도 유원지는 훗날 한국전쟁 와중에 파괴되었다.<ref>[http://smart.incheon.go.kr/incheon/list_view2.html?code=19085&m_code=2577&m_code2=2585 월미도 조탕] {{웨이백|url=http://smart.incheon.go.kr/incheon/list_view2.html?code=19085&m_code=2577&m_code2=2585 |date=20140906085653 }}, 인천광역시</ref> 당시 발행되던 잡지 《[[개벽 (잡지)|개벽]]》 제48호에서는 〈전에 없던 명승〉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월미도 유원지에 대해 “이것을 보고는 웃는 사람도 잇고 아니 눈물짓는 사람도 만타. 風光이 제 아모리 絶佳하단덜 구경은 口敬이다. 아마도 其中에 웃는 사람들은 배불니 먹고 뒤짐지고 八字거름으로 그니는 그네들이 아니고 누구이랴 ”하고 평가하였다.<ref>[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4502 월미도의 해수탕, 조탕(潮湯)], 기호일보, 2008년 3월 10일</ref>
 
1914년 4월 행정 구역 개편에 의해 부군면이 통합되어 [[인천부]]의 판도는 종래 10개 면 가운데 부내면 전역과 다소면 일부만이 편입되고 나머지는 신설된 [[부천군]]에 흡수되었다. 이 때 경기도 고시 제8호에 의해 정해진 인천부의 정·리(町里) 명칭이 대거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193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는 부천군 다주면과 문학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부역(府域)을 확장하였다. 그 결과 인천부는 인구 10만 3백3명, 총면적은 27.123km로 전보다 약 4배가 권역이 늘어나게 됐다. 이 때의 행정 구역을 보면 본정(本町), 중정(仲町), 궁정(宮町), 욱정(旭町), 빈정(濱町), 해안정(海岸町), 항정(港町), 산수정(山手町), 송판정(松坂町) 등으로 일본식 지명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인천에는 지금도 송도와 같은 일본식 지명이 남아있다.<ref>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인천역사문화총서 53 《인천지명의 재발견》, 2009년, 56-5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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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고, 9월 8일 미군이 인천을 통해 상륙하였다. 상륙전 미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포고령 1호〉를 발표하여 “점령군에 대해 반항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경고하였다.<ref>{{harvnb|역사학연구소|2004|p=261}}</ref> 미군은 인천을 상륙하면서 한국을 적지로 여겼다. 인천은 집배원등 필요한 인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통행이 금지되었고, 환영행사도 금지하였다. 인천항에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나갔던 사람들은 일본 경찰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하였다. 분노한 시민들이 발포책임자를 잡아 미군에 넘겼으나 미군은 무죄방면하였다.<ref>송건호, 송건호 전집7 《한국 민족주주의의 탐구》, 한길사, 2002년, {{ISBN|8935655074}}, 237쪽</ref> 이 발포로 일제 시기 동안 노동운동과 항일운동에 헌신하였던 인천노동조합 위원장 권평근이 조준사격을 받고 즉사하였다.<ref>[http://smart.incheon.go.kr/incheon/list_internet_news_view.html?code=2801&m_code=345 인물로 보는 인천사 (34) 권평근] {{웨이백|url=http://smart.incheon.go.kr/incheon/list_internet_news_view.html?code=2801&m_code=345 |date=20140906085515 }}, 인천미디어</ref> 미군정은 상륙 당시의 사건에 대해 별다른 반성을 하지 않았으며,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도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미군은 처음부터 일본의 통치기구를 존속시키길 희망했다. 패전으로 공포를 느끼던 친일파는 곧바로 자신의 업무를 계속하였고, 그해 쌀 수확량의 20%가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ref>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년, {{ISBN|8976962265}}, 53쪽</ref> [[한국의 군정기|미군정]]은 건준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경찰이었던 사람들을 대부분 다시 경찰로 채용하였다.<ref name="인천시_인천의역사_214216" />
 
인천은 1920년대부터 지속되어 온 노동운동으로 좌익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해방이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건립되자 인천에는 전평 인천지부가 만들어졌다.<ref>[http://www.sbook.co.kr/view.html?serial=363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작은책</ref> 한편 우익인사였던 [[한국민주당]]의 간부 유창호는 부두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우익 노조인 인천자유노동조합을 만들었다.<ref>[https://iptwu.co.kr:10301/history/history1_1_1.htm?no=5&boardname=03 인천자유노동조합의 창립] {{웨이백|url=https://iptwu.co.kr:10301/history/history1_1_1.htm?no=5&boardname=03 |date=20140906111143 }}, 인천항운노조</ref> 전평이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 되는 사이 1946년 [[대한노총]]이 만들어지자 인천자유노동조합은 대한노총의 인천지부로 재편되었다. 해방정국 시기 인천 노동조합의 대부분은 전평을 지지하였다.
 
1946년 9월 전평은 전국총파업을 벌였다. 전평의 총파업은 군정 당국에 의해 불법으로 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익 단체들에 의한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김두한]] 등의 인물들이 활동하였던 우익 단체는 노동자들에게 [[린치]]를 가하는가 하면 살해 후 암매장을 하기도 하였다.<ref>김봉진, 〈[http://www.daeguhistory.org/original/97/2.%20%EA%B9%80%EB%B4%89%EC%A7%84.pdf 미군정기김두한의‘백색테러’와 대한민주청년동맹] {{웨이백|url=http://www.daeguhistory.org/original/97/2.%20%EA%B9%80%EB%B4%89%EC%A7%84.pdf |date=20140906085258 }}〉 , 《대구역사》 제97집</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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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화 ===
[[파일:Bupyeong-gu Incheon Korea.jpg|섬네일|부평구 주요부. 앞에 보이는 공장이 한국GM이다.]]
1955년 일제 시대 지어진 부평 자동차 공장(오늘날 [[한국GM]] 자리)에서 [[국제차량제작 시발]]을 만들었다. 그러나, 미군 지프차의 부품을 재사용한 국제차량제작 시발은 1957년 정부의 보유차량대수 제한조치로 타격을 입고 1964년 생산을 중단하였다. 부평의 자동차 산업은 이후 [[새나라자동차]], [[신진자동차공업]], [[새한자동차]], [[대우자동차]], 한국GM을 거쳐 계속되었다.<ref>{{harvnb|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p=283-285}} (상권)</ref>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수출주도형 경제 계획을 수립하고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인천은 서울에 인접한 주요한 항구로서 대규모 [[공업단지]] 조성과 함께 수출 단지로서 육성되었다. 1965년 인천수출산업공단이 설립되었고, 1969년부터는 주안기계공업단지가, 1970년부터는 인천 비금속공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인천은 [[제조업]] 중심의 도시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제조업 내에서 [[경공업]]의 비중이 현저히 감소하는 대신,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인천도 동일한 변화를 겪게 되어 1980년대에 [[남동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남동공업단지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인천의 용도지역 부적격업체 650여개를 포함한 수도권 내 이전대상 1,800여 업체가 연차적으로 입주하였다. 입주대상 대다수는 석유화학 및 조립금속 등의 중화학업체였다.<ref>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인천역사문화총서 30,《인천 경제의 재조명》, 2006년, 16-17쪽</ref>
 
인천의 연안은 원래 [[갯벌]]이 넓게 발달한 지역이나 산업단지의 건설로 많은 간척이 이루어져 해안선이 크게 변화하였다. 가장 많은 간척이 이루어진 시기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80년대로 인천 간척지의 46.2%가 이 때 형성되었다. 간척지는 산업 용지와 주거 용지로 사용되었으며, 서구, 연수구, 중구는 도시 용지 중에서 50% 이상이 간척으로 새롭게 건설된 땅이다.<ref>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인천의 갯벌과 간척》, 2009년</ref> 계속되는 간척으로 인천 앞바다의 갯벌을 생계 터전으로 삼고 있었던 어촌계는 하나 둘 문을 닫았다.<ref>{{harvnb|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p=58-61}} (하권)</ref>
 
1997년 [[대한민국의 IMF 구제금융 요청]]은 인천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1997년 7월 인천의 실업률은 9.5%(약 104,000 명)에 달했다.<ref>송정로, 《인천 시민사회운동 20년사》, 명문미디어아트팩, 2008년, {{ISBN|978-89-960-897-0-4}},167쪽</ref> 인천지역 제조업 매출의 25%를 차지하는 대우자동차가 사실상 부도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대규모 해직이 일어났다. 2001년 대우자동차는 두 차례의 희망 퇴직 끝에 1,750명을 해고하였고, 한국GM에 매각되었다.<ref>송정로, 《인천 시민사회운동 20년사》, 명문미디어아트팩, 2008년, {{ISBN|978-89-960-897-0-4}}, 119-120쪽</ref>
 
=== 교통의 확충 ===
[[파일:Incheon International Airport.jpg|섬네일|인천국제공항]]
산업화로 [[인천항]]의 물류량이 급증하자 1965년 제2도크 공사를 시작으로 인천항은 계속하여 확장되어왔다. 1974년 총사업비 149억 8,500만원이 든 제2도크가 완공되었고<ref>{{harvnb|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p=84}} (상권)</ref>, 1985년에는 5만톤급 갑문 1기를 증설하였으며, 2004년에는 인천 남항이 개장하였다. 인천항은 여전히 확장 중으로 2009년 신항 1단계 공사로 컨테이너터미널(6선석) 공사가 시작되었다.<ref>[http://www.icpa.or.kr/promote/gabmoon/history/index.do 소개 및 역사] {{웨이백|url=http://www.icpa.or.kr/promote/gabmoon/history/index.do |date=20140906085552 }}, 인천항만공사</ref>
 
경인선 역시 확장을 계속하여 1960년 복선화가 되었고 1974년 전철화되어 서울지하철 1호선에 연결되었다.<ref name="고종석" /> 오늘날 경인선은 도시의 확대로 지하화가 추진 중이다.<ref>[http://www.bucheon.go.kr/site/homepage/menu/viewMenu?menuid=001006006011 경인선지하화추진사업] {{웨이백|url=http://www.bucheon.go.kr/site/homepage/menu/viewMenu?menuid=001006006011 |date=20150220141912 }}, 부천시청</ref> [[경인고속도로]]는 1967년 착공하여 1969년 인천항에서 [[가좌 나들목]]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과 인천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한결 가깝게 되었다.<ref>진인혜, 《축제 정책과 지역 현황》,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년, {{ISBN|8971417234}}, 113-114쪽</ref> 서울과 인천 사이의 교통망 확충으로 인천은 서울과 기능적 통합을 이루게 되었고 시가지 확대로 서울-부천-인천이 연속적인 시가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인천의 도시성장 방향은 서울 및 주변도시와 연계되는 고속도로∙산업도로, 그리고 전철노선을 따라 인구가 집중되었다.<ref>{{harvnb|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p=253}}</ref> 1999년에는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되었다.<ref>[http://www.itrailnews.co.kr/news/article.html?no=9367 인천도시철도 개통 14주년], 인터넷레일뉴스, 2013년 10월 23일</ref>
 
[[인천국제공항]]은 1992년 공사가 시작되어 2001년 1단계 공사 준공을 하였다. 인천공항은 개항 원년인 2001년 공항 이용객수가 1,454만명에 불과했지만 이후 연평균 6.4%의 성장세를 보였다. 2014년 8월 누적 여객수 4억명을 돌파하였다.<ref>[http://www.traveltimes.co.kr/bbs/board.php?bo_table=News&wr_id=90637 인천국제공항 누적여객 4억명 돌파], 여행신문, 2014년 9월 1일</ref> 인천국제공항과 인천을 연결하기 위해 총 연장 4,420m의 [[영종대교]]<ref>[http://211.195.163.22/chiefgonjong2/02_airport01.htm#a 영종대교]{{깨진 링크|url=http://211.195.163.22/chiefgonjong2/02_airport01.htm }},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ref> 와 총 길이 21.38&nbsp;km(다리 길이 12.34&nbsp;km)의 [[인천대교]]<ref>[http://bizn.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0910060400285&code=920100&med=khan 인천대교 16일 개통… 차량 통행은 19일부터], 경향신문, 2009년 10월 6일</ref> 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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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장의 불빛 ====
1970년 공업화 과정에서 정부 정책은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노동자의 처우와 인권은 도외시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운영되어온 [[동일방직]]에서 1976년부터 1979년 사이에 있던 노동조합 와해 탄압 사건은 정부가 노동자를 어떻게 대하였는 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1976년 당시 동일방직의 종업수는 모두 1천 3백 70명으로, 그 가운데 남성근로자가 약 3백명, 여성근로자는 1천명에 가까웠다. 섬유산업 특유의 현산으로 여성근로자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남성중심으로 운영되는 어용노조여서 여성노동자를 보호하지 않았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을 위해 단결하여 1972년 지도부를 여성으로 교체하였다.<ref>[http://chuntaeil.org/section2/zar/img/70h_w.htm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의 기수들], 전태일재단</ref>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기계 소음에 시달리며 일해야 하였고, 1967년 한 달 평균 임금은 3,000원에 불과 하였다. 그해 근로자 평균임금 8,324원의 3분의 1도 안되는 저임금이었다.<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57996&cloc= 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⑤여성 - 46. 우리는 산업역군], 중앙일보, 2005년 8월 17일</ref> 이러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7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초대 주길자 위원장을 시작으로 1975년 이영숙, 1978년 이총각 등 민주적인 집행부가 계속하여 노동조합을 장악하자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노조 와해공작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1976년 7월 26일 회사와 중앙정보부 사주를 받은 노조 반대파가 물리력을 동원하여 노조를 와해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맞서 항의 농성을 하던 여공들은 경찰이 강제해산을 시도하자 옷을 벗어 저항한 '알몸시위 사건'을 벌였다. 이어 1978년 2월 21일 노조 대의원 선거일에는 새벽에 밤샘작업을 마치고 투표를 하려고 줄을 지어 나오고 있는 조합원을 향해 반대파 조합원들이 똥물을 투척한 소위 '똥물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중앙정보부 지시에 의해 1978년 4월 1일자로 동일방직 노동조합 간부와 조합원 124명이 강제해고되어 민주적 노동조합은 와해되고 말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을 할 수 없었다. 2010년 2월 대법원은 동일방직 노조사건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피해자 개인에게 2천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ref>[http://www.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sq=10231&m_no=2&sec=2 동일방직 노조탄압 국가배상 판결 의미], 인천in, 2011년 10월 20일</ref>
 
=== 정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