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시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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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시제 유현'''(漢 更始帝 劉玄, ? ~ [[25년]])은 [[중국]] [[현한]]의 제1대 황제로, [[자 (이름)|자]]는 '''성공'''(聖公)이며 [[형주]] [[남양군 (중국)|남양군]] 채양현 사람이다. [[전한 경제]]의 6대손이자 [[후한 광무제]]의 족형이다. [[녹림군]]에서 추대된 황제로, [[신나라]] 멸망 후 정권을 잡았으나 실정으로 인해 [[적미군]]이 [[유분자]]를 황제로 추대하면서 정권이 붕괴돼 제위에서 물러났다. 적미군에게 살해된 후, 적미군까지 몰아내고 전 중국을 통일한 [[후한]] [[후한 광무제|광무제]]가 '''회양무순왕'''(淮陽武順王)으로 추증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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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2월, 장안으로 천도하였다. 왕망이 패망했을 때 미앙궁만 불탔고 나머지 궁궐과 건물은 남아 있어, 궁녀와 기타 궁실의 물건들을 고치지 않고 옛 것을 그대로 썼다.
 
이송과 조맹이 공신들을 왕으로 봉할 것을 상주하자, 주유가 전한 고제의 명령대로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경시제는 먼저 종실 중 태상장군[[태상 (관직)|태상]]장군(太常將軍) [[유지 (성양공왕)|유지]]를 정도왕(定陶王)에, 유사(劉賜)를 완왕(宛王)에, 유경(劉慶)을 연왕(燕王)에, 유흡(劉歙)을 원씨왕(元氏王)에, 대장군 [[유가 (劉嘉순양회후)|유가]][[한중왕(漢中王)]]에, 유신(劉信)을 여음왕(汝陰王)에 봉했고, 나중에 이성제후왕을 세우니 왕광은 비양왕(比陽王)에, 왕봉은 의성왕(宜城王)에, 주유는 교동왕(膠東王)에, 위위대장군(衛尉大將軍) 장앙(張卬)은 회양왕(淮陽王)에, 정위대장군(廷尉大將軍) 왕상은 등왕(鄧王)에, 집금오대장군(執金吾大將軍) 요담은 양왕(穰王)에, 신도건(申屠建)은 평씨왕(平氏王)에, 상서 호은(胡殷)은 수왕(隨王)에, 주천대장군(桂天大將軍) 이통(李通)은 서평왕(西平王)에, 오위중랑장(五威中郞將) 이질(李軼)은 무음왕(舞陰王)에, 수형대장군(水衡大將軍) 성단(成丹)은 양읍왕(襄邑王)에, 대사공 진목은 음평왕(陰平王)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송조(宋佻)는 영음왕(潁陰王)에, 윤존(尹尊)은 언왕(郾王)에 봉했다. 주유만이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음은 감히 바꿀 수 없다 해 끝까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주유는 좌대사마, 유사는 전대사마로 옮기고, 이송을 승상, 조맹을 우대사마로 옮겼다.
 
경시제는 성격이 유약하여 황제가 된 후 궁정생활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모두 장인인 조맹(趙萌, 경시제는 조맹의 딸을 조황후로 처로 삼음)에게 위탁하고 전권을 방임하였다. 조맹이 방종한다고 아뢰는 신하를 친히 베어 죽였고, 그 뒤로는 감히 간하는 자가 없었다.이질·주유는 산동에서, 왕광·장앙은 삼보에서 전횡을 부렸다. 궁중에서 시중드는 소년이나 요리사들이 관작을 많이 받아, 장안에서는 “부뚜막에서 불 때면 중랑장, 양의 위를 구우면 기도위, 양의 머리를 구우면 관내후”라는 풍자가 돌아다녔다. 관중에서는 민심이 떠났고, 사방에서 원망과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각지의 장수들이 제멋대로 주목과 태수를 임명하는데 서로 중복되고 꼬여서 사람들이 대체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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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구(劉求) : 양읍후(襄邑侯, 후에 성양후(成陽侯)로 고쳐 봉해짐). 유현의 제사를 이었다.
** 유흠(劉歆) : 곡숙후(谷熟侯)
** 유리(劉鯉) : 수광후(壽光侯). 적미황제 유분자(劉盆子)의 형인 식후(式侯) 유공(劉恭)과 유현을 배신하고 적미에 먼저 투한한 장앙(張卬)이 적미군의 부장인 [[사록유분자]](謝祿)을 시켜,때문에 자신의 부친 유현을 죽인 뒤에 사록의 행동이라 하고 입막음한 것에아버지가 원함을죽었다고 품었는데원망해, 패헌왕(沛獻王) 유보(劉輔)의 총애를 믿고 자신의 집에 머물던 빈객들을 시켜, 유공을유분자의 형이지만 경시제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유공 (식후)|유공]]을 살해함
* 손자
** 유순(劉巡) : 유구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