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너 앙상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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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에 나온 브레히트의 아이디어에 따라 1959년에 다양한 "작업반"들이 만들어졌는데, 이 작업반들은 베를리너 앙상블에서의 연극작업을 예술적이고 사회적으로 이끌어가야 했는데, 특히 "연극 이론을 위한 작업반", "스튜디오 작업반" 그리고 "청중과 함께하는 작업을 위한 작업반"이 그 주된 작업반들이었다. 앙상블의 작업은 실제로 브레히트를 통해 특징지어졌는데, 그는 연출가이자 작가로서 건물을 그 자신의 극장으로 만들었다.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장막 위에 그려져 있었다. 그의 탁월한 명성 덕분에 앙상블은 국내와 해외에서 종종 객연 요청을 받았고, 그래서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이탈리아에도 갔었다. 런던으로의 객연여행을 준비하던 중에 브레히트는 사망했다. 서사극과 공동작업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의 과부인 헬레네 바이겔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그녀는 설립에서부터 1971년 사망할 때까지 베를리너 앙상블의 극장장이었다.
 
만프레드 벡베어트(Manfred Wekwerth), 페터 팔리치(Peter Palitzsch), 이조트 킬리안(Isot Kilian) 그리고 요아힘 텐셔트(Joachim Tenschert) 와 같은 조연출들은 브레히트의 가르침을 받았었는데, 이제는 공동으로 배우들과 함께 그 일을 이어나갔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 파울 데사우(Paul Dessau)를 남편으로 둔 루트 베르크하우스(Ruth Bergaus)가 극장장으로서 헬레네 바이겔의 뒤를 이었다. 실험적인 극도 무대에 올리기 위한 그녀의 시도는 앙상블과 공중에게 저항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는 마침내 그녀를 사퇴하도록 했다.
 
루트 베르크하우스는 1977년에 만프레드 벡베어트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그는 그 극장을 1991년까지 운영했다. 이 다음해부터는 조직적인 부분에서 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견의 여지가 있는 "공동체 극장주"에 의해서 관리되었는데 1992년부터 1993년까지는 마티아스 랑호프(Matthias Langhoff), 프리츠 마르쿠바트(Fritz Marquardt), 페터 팔리취(Peter Palitzsch), 페터 차데크(Peter Zadek), 하이너 뮐러(Heiner Müller)에 의해 관리되었고, 1993년부터 1994년까지는 마르쿠바트, 팔리치, 차데크, 뮐러, 1994년부터 1995년까지는 마르쿠바트, 팔리취, 뮐러, 1995년에는 뮐러, 1996년에는 마틴 부트케(Martin Wuttke), 그리고 1997년부터 1999년까지는 슈테판 주슈케(Stephan Suschke)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