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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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2={{PRK}}
|지휘관1={{국기그림|대한민국}} [[유재흥]](劉載興) 제7사단장 준장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함준호 (군인)|함준호]](咸俊鎬) 제1연대장 대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한태원]](韓泰源) 제1대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의명]](李義明) 제2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김황목]](金煌穆) 제3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윤춘근]](尹春根) 제9연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류환박]](柳桓博) 제1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전순기]](田舜基) 제2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철원]](李哲源) 제3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규삼]](李奎三) 제5포병대대장 소령 <br />{{국기그림|대한민국}}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br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상근 (1922년)|이상근]](李尙根) 제3연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임백진]](任百振) 제1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박남표]](朴楠杓) 제2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김봉상]](金鳳翔) 제3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임충식 (1922년)|임충식]](任忠植) 제18연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장충권]](張春權) 제2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안민일]](安玟一) 제3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박창암]](朴蒼岩) 보국대대 제2중대장 중위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형근]] 제2사단장 준장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박기성 (군인)|박기성]] 제5연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정도]] 제1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차갑준]] 제2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문용채 (1916년)|문용채]] 제16연대장 대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유의준]] 제1대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김헌]] 제2대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김병휘]] 제25연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나희필]] 제2대대장 대위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고동석]] 제3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김풍익]]† 포병학교 제2교도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준식 (1900년)|이준식]] 육군사령학교장 준장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조암]] 생도대대장 중령
|지휘관2={{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웅 (1912년)|김웅]] 제1군단장 중장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영호리영호 (군인한국 전쟁)|이영호리영호]](李英鎬) 제3사단장 소장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창봉]](金昌鳳) 제7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병종]](金秉鍾) 제8연대장 중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만익]](金萬益) 제9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안백성]](安白成) 포병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권무]] 제4사단장 소장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인덕]] 제5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승희 (군인)|박승희]] 제16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희준 (군인)|김희준]] 제18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경수]] 제105기갑여단장 소장
|병력1=국군 7보병사단 <br /> 국군 2보병사단 <br /> 수도방위사령부
|병력2=조선인민군 3사단 <br /> 조선인민군 4사단 <br /> [[제105기갑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인민군 105탱크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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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에 경계한 동두천·포천과 그 후방인 의정부 지역은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의 예하 제1·9연대(각각 동두천·포천을 담당)와 포병·공병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전쟁 직전의 부대 개편과 기초훈련 실시로 인해, 2대 대대가 경비를 담당했다. 한편 북한군은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하에 제1군단(군단장 김웅 중장)의 2개 사단이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할 준비를 해 두었다. 이와 같이 북한군은 처음부터 여기에 공격의 중점을 두고 병력과 화력을 집중 투입한데 반하여 국군 측에서는 아무런 대비 없이 이와 맞섬으로써 전투 초기의 상황이 급박하게 변해갔다. 특히 이 지역은, 경원 본도인 3번 도로를 비롯하여 동측의 43번과 서측의 316번이 모두 양호한 노면에 열을 지은 듯 남북으로 뻗힌 데다, [[광천산맥]]과 [[천보산맥]]이 종벽을 이루어,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횡적 연계와 종심 배치에 불리한데 비하여 공격하는 입장은 기계화 부대의 운영과 공격 돌입이 용이하였다.
 
발발 당일, 북한군 제3사단(사단장 이영호리영호 소장)은 포천 정면에 배치되어 영내에 대기하고 있던 한국군 제9연대(연대장 윤춘근 중령)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경계임무 중이던 제9연대 제2대대(대대장 전순기 소령)는 북한군의 포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2대대장의 전황 보고를 받은 제9연대장(윤춘근)은 의정부읍내에 대기 중이던 제1·3대대로 하여금 포천 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7·9연대는 [[호국로]]를 따라 남침을 계속했다. 이에, 제9연대 제1·3대대는 끝내 흩어지고 다음날 의정부 등에서 집결했다. 한편,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의 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중령)가 포천에 급파되어 소흘읍 송우리 부근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북한의 기계화부대에 밀려서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후퇴를 거듭했다.(이상, 6월 25일의 포천 전투) 한편, 북한군 제4사단(사단장 리권무 소장)은 동두천 북쪽의 연천 전곡 등지에 포격을 가한 뒤, 국도 제3호선([[평화로 (의정부 철원)|평화로]])를 따라 동두천으로 밀고 내려왔다. 동두천의 사수에 나선 제1연대는 소요산 등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지연전을 펼쳤으나 끝내 동두천은 함락되었다.(이상, 6월 25일의 동두천 전투) 이렇게, 개전 첫날 제7사단이 [[포천]]과 [[동두천]] 부근에서 서전을 치르고 패함으로써, 그 남쪽에 있는 의정부가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의정부에서는 [[대전]]으로부터 증원된 제2사단이 제7사단과 함께 북한군과 격돌하게 되어 이 지역은 수도 서울의 관문과도 같아 피아간에 주력이 되었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17쪽. <!-- 그 경과의 대요를 보면, 벽두에 제7사단이 포천과 동두천 부근에서 서전을 치른데 이어, 대전에서 부원(赴援)한 제2사단이 의정부 부근에서 격돌케 되는 바, 바로 이 지역은 수도 서울의 관문과도 같아 피아간에 주력으로써 대결케 되었던 것이다.--></ref> <!--협의의 의정부 전투의 개요 보충할 것.-->
 
== 전투 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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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당 사단의 책임 지역이 그 주목표로 부상하게 되었거니와, 이들은 다시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동월 18일부로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의로 된 정찰명령 제 1호를 하달하였는데, 그 개요를 보면, 소대군위 이하의 병력 배치선 까지 정찰토록 하는 세밀한 계획을 세워 특히 유개진지와 병력배치상황 그리고 장애물 지대 및 예상 집결지 등을 확인토록 하였으며, 여기에 이어 공격목표의 선정과 부대의 기동계획을 마련토록 명시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찰을 마친 그들은 6월 22일 14:00부로 전투명령 제 1호를 하달하여 23일 12:00까지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토록 촉구하였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사단의 경계진지와 주진지를 빠짐없이 공격목표로 선정한 점과 포병을 비롯한 공병과 반전차포 및 항공등의 지원 아래 서울까지 일거공략 하려는 계획을 미리 밝히고 있는 점이다. 제3사단(사단장, 소장 이영호리영호)은 포천 북쪽의 [[영중면]] 영평천 부근으로 나와, 제7연대(장, 대좌 김창봉)와 제9연대(장, 대좌 김만익)을 좌우 일선에 두고 제8연대(장, 중좌 김병종)을 예비로 보유하였으며 제3사단의 포병연대(장, 대좌 안백성)는 유정리(楡亭里) 부근에서 지원태세를 갖추었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18쪽. <!-- 제3사단은 소장 이영호의리영호의 지휘 아래 포천 북쪽의 영평천 부근으로 나와, 제7연대(장, 대좌 김창봉)와 제9연대(장, 대좌 김만익)을 좌우 일선에 두고 제8연대(장, 중좌 김병종)을 예비로 보유하였으며 동사단의 포병연대(장, 대좌 안백성)는 유정리(楡亭里) 부근에서 지원태세를 갖추었다.
--></ref>
== 포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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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2={{PRK}}
|지휘관1={{국기그림|대한민국}} [[유재흥]] 제7사단장 준장(6월 26일 14.00부로 의정부지구 전투사령관)<ref>이하의 지휘관 명단은 모두 《[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戰鬪 〉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16쪽. 참조.</ref>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윤춘근]](尹春根) 제9연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류환박]](柳桓博) 제1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전순기]](田舜基) 제2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철원]](李哲源) 제3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규삼]](李奎三) 제5포병대대장 소령 <br />{{국기그림|대한민국}}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br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상근 (1922년)|이상근]](李尙根) 제3연대장 중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임백진]](任百振) 제1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박남표]](朴楠杓) 제2대대장 소령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김봉상]](金鳳翔) 제3대대장 소령
|지휘관2={{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웅 (1912년)|김웅]] 제1군단장 중장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영호리영호 (군인한국 전쟁)|이영호리영호]] 제3사단장 소장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창봉]] 제7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병종]] 제8연대장 중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만익]] 제9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안백성]] 포병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권무]] 제4사단장 소장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인덕]] 제5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승희 (군인)|박승희]] 제16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희준 (군인)|김희준]] 제18연대장 대좌 <br /> {{국기그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경수]] [[제105기갑사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제105기갑여단]]장 소장
|병력1=
|병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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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2=
}}
6·25 발발 직전, [[38선]]에 경계한 [[동두천]]·[[포천군|포천]]과 그 후방인 [[의정부시|의정부]] 지역은 [[대한민국 7보병사단|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의 예하 제1·9연대와 포병·공병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중, 제9연대(연대장 [[윤춘근]] 중령)는 포천 정면에 배치되었다. 한편 북한군은 철원-연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려는 계획하에 제1군단(군단장 [[김웅 (1912년)|김웅]] 중장)의 2개 사단이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할 준비를 해 두었다. 발발 당일, 북한군 제3사단(사단장 이영호리영호 소장)은 영내에 대기하고 있던 한국군 제9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경계임무 중이던 제9연대 제2대대(대대장 [[전순기]] 소령)는 북한군의 포격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제2대대장의 전황 보고를 받은 제9연대장(윤춘근)은 의정부읍내에 대기 중이던 제1·3대대로 하여금 포천 [[신북면 (포천시)|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진지를 구축하게 하고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은 잠시 주춤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 제7·9연대는 [[호국로]]를 따라 남침을 계속했다. 이에, 제9연대 제1·3대대는 끝내 흩어지고 다음날 [[의정부시|의정부]] 등에서 집결했다. 한편, [[수도경비사령부]] 예하의 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1922년)|이상근]] 중령)가 포천에 급파되어 [[소흘읍]] 송우리 부근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북한의 기계화부대에 밀려서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후퇴를 거듭했다.(이상, 6월 25일) 이로써 축석령 너머에 있는 의정부는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 제9연대의 영내 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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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2=[[김웅 (1912년)|김웅]] 제1군단장 중장
: [[이영호리영호 (군인한국 전쟁)|이영호리영호]](李英鎬) 제3사단장 소장
:: [[김창봉]](金昌鳳) 제7연대장 대좌
:: [[김병종]](金秉鍾) 제8연대장 중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