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 (제무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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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신나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군이 발생하자, 호걸들을 불러모으고 매부 [[등신]](鄧晨)에게는 신야로, 광무제와 [[이통 (차원)|이통]](李通) · 이질(李軼)에게는 완으로 가서 거병하게 하고 자신은 용릉의 자제들을 모아 지황 3년(22년) 11월에<ref>범엽: 《후한서》 권1 상 광무제기제1 상</ref> 거병했다. 스스로 주천도부(柱天都部)를 일컫고 신시병과 평림병과 합류해 [[녹림군|녹림당]]의 산하에 들어갔다. 거병 초기에 [[남양군 (중국)|전수]][[태수|대부]] [[진부(甄阜)]]·전수[[도위|속정]] 양구사(梁丘賜)와 싸워 대패해 누나 [[유원 (신야절의장공주)|유원]]과 아우 [[유중 (노애왕)|유중]]을 잃었고 종중 수십 명을 잃고 처음에 확보한 극양(棘陽)을 지켰다. 유인이 지자 신시병과 평림병은 돌아가려 했으나 유인이 설득하고 진부와 양구사가 치중을 둔 남향(藍鄕)을 습격해 치중을 죄다 뺏은 다음에 진부와 양구사를 쳐 무찌르고 추격해 진부와 양구사를 베었다. 신나라의 [[대사농|납언장군]] [[장우 (신)|장우]]와 [[태상 (관직)|질종장군]] 진무(陳茂)도 크게 무찌르고 완을 포위하면서 주천대장군(柱天大將軍)을 일컬었다.<ref name="hh14">범엽: 《후한서》 권14 종실사왕삼후열전제4 중 제무왕전{{위키문헌|:zh:後漢書/卷14|후한서 권14 종실사왕삼후열전제4}}</ref>
 
견부와 양구사를 죽인 뒤로 인망이 높아져 황제로 추대하려는 여론을 얻었으나, 신시병과 평림병은 유인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유인의 족형으로 평림병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나약한 [[한 경시제|유현]]을 옹립할 의사를 밝혔다. 유인은 분쟁이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신시병과 평림병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현이 즉위하고 연호를 [[경시 (신)|경시]]라 하니, 곧 경시제다. 유인은 대사도가 되고 한신후에 봉해졌다. 평림병이 신야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는데, 신야[[현령|재]] 등성언(鄧城言)은 사도에게라면 항복할 것이라 하고 이에 유인이 가서 등성언의 항복을 받았다. 5월에 완을 함락했고, 6월에는 광무제가 [[곤양 전투]]에서 신나라를 크게 무찔러, 형제의 주가는 더욱 드높아졌다.<ref name="hh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