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불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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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 ==
18세기 중엽에 [[프랑스]]는 베트남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남북 대립시기로 북쪽은 [[하노이]]에 여씨(黎氏)가, 남쪽에는 [[후에]]에 응우옌주가 세력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1777년에 또다른 응우옌씨가응우옌주가 [[후에]]를 빼앗고 [[하노이]] 마저 차지하였다. 이에 처음부터 [[후에]]에 있었던 응우옌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에게 도움을응원을 요청하였다. 프랑스는 영토 할양과 프랑스인의 거주, 왕래, 상무의 독점 등 특혜를 조건으로 내세워 원조하기로 하였으나, 프랑스의 별다른 도움 없이 1802년에 후에의 응우옌 왕조가 다시 일어나 마침내 베트남 전역을 통일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5~337}}
 
프랑스는 19세기 전반에 베트남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에 베트남도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858년 에스파냐 선교사 2명을 처형했다는 구실로 프랑스와 에스파냐은 다낭에 군대를 파견, 사이공 등지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비엔호아(Bienhòa), 자딘(Giadinh) 딘뜨엉(Dinhtuong) 등 3개주의 할양, 배상금 지불과 메콩강의 항행, 기독교 포교 특권을 인정하고, 또한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 내용의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5~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