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불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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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19세기 전반에 베트남의 경영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에 베트남도 프랑스의 태도를 보고 경계하기 시작하여 쌍방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858년 에스파냐 선교사 2명을 처형했다는 구실로 프랑스와 에스파냐은 다낭에 군대를 파견, 사이공 등지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1862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비엔호아(Bienhoa), 자딘(Giadinh) 딘뜨엉(Dinhtuong) 등 3개주과 꼰다오 제도의 할양, 배상금 지불과 메콩강의 항행, 기독교 포교 특권을 인정하고, 또한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 내용의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5~337}}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지배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에 1867년에 프랑스는 빈롱(Vinhlong), 안장(Angiang), 하찌엔하띠엔(Hatien) 3개주를 병탄과 캄보디아 지배을 하고 [[메콩강]]을 통해 [[운남]]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나 그 상류로는 항행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1871년에 프랑스의 모험가 뒤퓌(Jeon Dupuis)가 [[홍하]]를 통해 [[운남]]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프랑스는 이를 통하여 중국으로 진출하려고 1873년 11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하노이, [[하이즈엉]], 닌빈 등지를 공격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5~337}}
 
베트남은 프랑스의 공격을 받게 되자 '흑기군'을 불러들여 공동으로 프랑스에 대항하려 하였다.<ref name="신승하"/> {{Rp|335~337}}그러나 베트남은 프랑스의 외교적인 압력아래 [[사이공]]에서 1874년 3월에 평화와 연맹조약(이를 〈[[제2차 사이공 조약]]〉이라고도 한다.)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