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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대남 뜨득제는 비준에 앞서 불평등한 조약에 불만을 품고 동부 3성 반환 교섭 사절을 양국에 보내지만 실패하였다.
 
그해 그는 프랑스의 초청을 받고, 그해 11월 베트남 사절단 범부서팜푸트(Phạm Phú Thứ, 范富恕, 팜푸트), 위극탄응우이칵단(Ngụy Khắc Đản, 魏克憻, 응우이칵단)과 함께 파리로 가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와 황후 유진을 영접하였다. 이때 그는 3성 반환을 요구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베트남에 대한 야욕은 없으며, 사이공, 자딘, 미토를 프랑스에게 할양할 것과 [[베트남]]이 프랑스의 군사 보호하에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법무대신 샤슬루-로바 백작은 영토 반환은 안 된다며 강력 반대했고, [[나폴레옹 3세]]는 결국 이 문제를 1864년 6월에 다시 협상하기로 한다.
 
프랑스 체류 중 그는 사신단과 함께 프랑스를 두루 시찰하던 판타인잔은 산업 혁명과 그 결과물인 증기기관차와 증기선, 프랑스 유럽의 신기술 등을 처음 목격했다. 새로운 문물의 존재를 목격한 그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베트남으로 귀국한 후 그는 뜨득제에게 프랑스의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강력한 신기술과 새로운 문물을 설명한다. 그러나 뜨득제는 그렇지 않다며, 시를 지어 인의와 도덕과 윤리의 힘으로 우리가 프랑스군 침략자들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오히려 판타인잔을 책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