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인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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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판타인잔은 프랑스에게 베트남 식민화를 위한 노력을 중단하고, 동부 3개성을 반환하는 대신 [[베트남]] 완조 조정은 사이공·미토·무이붕터우 부근에 교역지를 두고 프랑스에 매년 조공을 바치며, 남부 베트남 전체를 프랑스의 보호령화하는 조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뜨득 황제가 이 중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불만을 느껴 베트남에 유리하게 조항을 수정했지만 프랑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864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1865년]] 프랑스는 원래의 조약내용만을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판타인잔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으며 결과적으로 국민을 배반하게 되었다고 낙담했다. 프랑스 방문 시 증기기관차와 자동차, 각종 신문물을 구경했던 그는 서구문명의 영향을 두려워했고 유럽의 기술문명을 불신했다. [[1865년]] 판타인잔은 남기경략사(南圻經略使)에 임명되어 파견되고 서부 3성(빈롱, 안장, 하찌엔하띠엔)에의 태수를 겸임하였다.
 
==== 항전과 자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