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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월미도 1947년.jpg|대체글=1947년에 월미도를 찍은 항공사진.|프레임|월미도. 1947년.]]
== 개요 ==
 
'''월미도'''(月尾島, {{Llang|en|Wolmido, Wolmi Island, Wolmido Island, Roze Island}})는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된 [[인천]] 앞바다의 [[육계도]]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서남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북동쪽은 완만한 [[구릉]]이다. 달꼬리라서 월미도가 아니라 '얼다(어르다)'의 '얼'과 물(水)을 뜻하는 '미'가 합쳐져 '물이 섞이는(어르는, 휘감아 도는) 섬'이라는 '얼미도'라는 이름이 붙었고, 한자로 음차하면서 '월미도'가 되었다.<ref>{{서적 인용|url=|제목=월미도가 달꼬리라구?|성=최재용|이름=|날짜=|출판사=다인아트|isbn=8989014204|확인날짜=}}</ref><ref name=":3">{{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981|제목=월미도(月尾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2018-12-07}}</ref><ref>{{웹 인용|url=http://www.kihoilbo.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776186|제목=월미행궁 터|성=기호일보|날짜=2018-11-05|언어=ko|확인날짜=2018-12-08}}</ref><ref name=":17" />
 
월미도는 면적이 0.7㎢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었지만 [[제물포]](지금의 [[인천항]])가 항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월미도가 제물포 앞에 딱 버티고 서서, 파도와 바람으로부터 제물포에 정박한 배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때 [[몽골 제국|몽골]] 기마병이 바람처럼 달려와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막아버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이 1656년([[효종]] 7)에 제 2의 피난길을 개척할 때 기착지로서 월미도에 월미행궁이 지어지기도 했다.<ref name=":0">{{서적 인용|url=|제목=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작은 섬 월미도가 겪은 큰 전쟁들|성=강변구|이름=|날짜=2017년 9월 10일|출판사=서해문집|isbn=9788974838720|확인날짜=}}</ref>{{Rp|14-20}}
 
== 유래 ==
그 누구도 인천항 정면에 딱 버티고 선 월미도를 지나지 않고서는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월미도는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외국 군대에게 점령되어 군사 요충지로 쓰이는 기구한 운명을 맞아야만 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때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찾으러 인천에 접근한 이양선들이 입항 전 한 차례 머무르는 섬이었으며,<ref name=":0" />{{Rp|30}} [[일본 제국|일]]·[[청나라|청]]·[[러시아 제국|러]]가 조차 경쟁을 벌일 때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일제 해군의 석탄 창고가 설치되는 수모를 겪었다.<ref name=":0" />{{Rp|126}} [[러일 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 해전]]은 월미도 앞바다(월미해협)에서 벌어졌고, 일제가 승리하고 나서는 병참기지화되었다.<ref name=":0" />{{참고 쪽|152}}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소위 '조선 제일의 유원지'라는 명목으로 월미조탕을 비롯한 유원지, 숙박시설을 지어 부유한 자들에게만 호화로운 인공낙원을 제공하였다.<ref name=":0" />{{Rp|163-174}}<ref name=":1">{{웹 인용|url=http://korean1.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7585|제목=월미도-대한민국 구석구석 행복여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18-12-07}}</ref>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미군에게서 [[네이팜탄]] 폭격을 당하고 인천으로 가는 길을 터 주게 되었다. 이 폭격으로 약 120가구 600여 명이 살던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월미도민 100여 명과 월미도에 파견된 육지의 노무자 상당수가 죽었다.<ref name=":0" />{{Rp|220-245}} 전쟁이 끝나고 피란에서 돌아온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귀향하여 사라진 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휴전 후에 미군부대가 계속 주둔해서, 미군 부대가 물러가자마자 바로 한국군이 들어와 해군 기지를 세워서, 국방부와 인천시가 도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월미도를 사고팔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민들은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려 배상과 귀향을 요구하였고,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가가 월미도민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 인천의 명소 ==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인천 바닷가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ref>인천관광공사, 《인천관광동향 보고서》 40쪽 </ref>로 떠올랐다. 썰물 때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바닷물을 볼 수 있다. [[월미산]]에 둘레길이 조성되고, 한국전통정원, 전통문화체험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이 설립된 데다가, 다양한 놀이동산까지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인천 명소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ref name=":12">{{웹 인용|url=http://korean1.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7585|제목=월미도-대한민국 구석구석 행복여행|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18-12-07}}</ref><ref>{{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655690.html|제목=월미도에서 배만 타면 아깝지|날짜=2014-09-17|언어=ko|확인날짜=2018-12-07}}</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