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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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반 ===
==== 초기 삶 ====
[[파일:허헌선생.jpg|썸네일섬네일|오른쪽|아버지 [[허헌]]]]
허정숙은 [[1902년]] [[7월 16일]] 독립운동가 겸 [[변호사]] [[허헌]](許憲)과 그의 부인인 [[경주 정씨]] [[정보영]](鄭寶榮, 다른 이름은 정긍자(鄭兢子))의 둘째 딸로 [[경성부]] [[종로구|종로방]] [[관철동]]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정자(貞子), 호는 수가이이다. 일찍이 요절한 언니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생년은 불분명하여 [[1902년]]생 설, [[1903년]]생 설, [[1906년]]생 설, [[1908년]]생 설 등이 있다. 허정숙의 출생지는 [[경성부]]였으나, 본적지이자 아버지 [[허헌]]의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군]] 하우면 하평리이었다. 따라서 [[명천군]] 출신으로도 본다. 그가 태어날 때 위로는 언니 허정희(許貞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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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유학과 귀국 ====
[[파일:Park Jhu 1928.jpg|섬네일|left왼쪽|160px|[[주세죽]]과 [[박헌영]]]]
 
그러나 [[간사이 학원]]의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1920년]] 여름 방학 때 [[간사이 학원]]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허헌]]의 뜻에 의해 다시 [[일본]]으로 보내져, [[고베 신학교]]로 진학하였으나 역시 적응하지 못하고 귀국한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수녀원 같은 생활을 견디지 못해 중도에 뛰쳐나온' 것이었다. 그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간사이 학원]]을 수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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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 단발과 단발의 보급 ====
[[파일:Heo Jong-suk 1926.PNG|썸네일섬네일|오른쪽|140px|허정숙]]
[[1920년]] 그는 공개적으로 머리를 자르는 단발을 하였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오두가단 차발불가단]]을 외치던 [[성리학]]자들은 그를 패륜아라며 공격하였다. 그러자 허정숙은 더욱 저항하는 의미에서 자주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을 공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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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해방론의 토착화 노력 ====
[[1924년]] [[1월]]부터 그는 여성 해방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YMCA청년회와 [[사회주의]] 모임, 여성 계몽 강연에 나가 여성해방론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여성 지식인들의 참여와 자각을 호소하였다. [[1924년]] [[5월]] [[주세죽]]·허정숙·[[박원희]]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운동가들이 [[조선여성동우회]]를 만들었다.<ref name="yeosong182">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문집, 2004) 182페이지</ref> [[1924년]] [[5월 23일]] 허정숙은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는 등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작성한 [[조선여성동우회]]의 강령 초안에는 '사회진화의 법칙', '신사회 개척', '조선여성해방운동' 등이 있었다. 또한 그는 [[동아일보]] 등에도 글과 컬럼을 기고했는데 이때 그는 '수가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고<ref>영어 sky를 한글 음운으로 순화한 것이다.</ref>, 한자로는 '秀嘉伊'라 하였다.
 
[[김명순 (1896년)|김명순]], [[김일엽 (승려)|김일엽]], [[나혜석]], [[윤심덕]], [[박인덕]] 등 [[3·1 운동]]을 전후하여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20년대]] 중반까지 문화계에서 활동을 한 여성들이 신여성의 대표로 알려졌다.<ref name="sinmun345">한국여성문학학회,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소명출판, 2008) 345페이지</ref> 또 [[1920년대]] 대중들 앞에 등장한 허정숙과 [[정종명]]은 의식적으로 사회 해방을 추구하고, 낭만적 사랑보다는 동지애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지향점은 그들과는 달랐지만 신여성으로 통칭되었다.<ref name="sinmun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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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단체 활동과 동아일보 기자 생활 =====
[[파일:Dong a ilbo 19200401.jpg|섬네일|250px|[[동아일보]]]]
[[파일:국제무산부인대회.png|썸네일섬네일|왼쪽|140px|[[1925년]] [[3월 10일]]의 [[세계 여성의 날|국제무산부인대회]]]]
{{참고|세계 여성의 날|동아일보}}
[[1925년]] [[1월]] [[화요파]]는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서울파는 [[경성여자청년회]]를 결성했다.<ref name="yeosong182"/> 허정숙은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창립에도 참여,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허정숙은 세 단체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 합심, 협력을 것을 호소하며 통합, 연대를 추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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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
[[파일:Huh Jung-sook.jpg|섬네일|right오른쪽|200px|[[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 투옥 중]]
{{참고|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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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론타이 사상 소개 ====
[[파일:Alexandra Kollontai.jpg|섬네일|right오른쪽|150px|[[소련]]의 여성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유명한 [[페미니스트]]이자 여성 [[사회주의자]]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여성 해방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미국]], [[일본]], [[프랑스]] 등으로부터 받아들인 자유주의 페미니즘과는 또다른 형태의 사회주의와 결합한 형태의 페미니즘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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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회 활동과 근우회 확장 운동 ====
[[파일:Heo Jong-suk 1930.png|섬네일|200px|right오른쪽|허정숙, 1920년대 후반 무렵]]
[[파일:신간회 창립.jpg|섬네일|250px|left왼쪽|[[신간회]] 창립 모습 (1927.2.14.)]]
{{참고|신간회|근우회}}
귀국 직후 그는 [[신간회]]에도 가담했고, [[근우회]]에서 본격 활동하였다. 근우회는 창립 초기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여성부 형태가 아니라 여성만의 별도 조직으로 출범했다.<ref name="parkeu3466">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346</ref> 이를 당시에는 '성별 조직'이라고 불렀다.<ref name="parkeu3476">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347</ref> 일각에서는 성별 조직을 만들어서 [[민족주의|민족 운동]] 단체의 분열을 촉진시킨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허정숙은 분열을 원하는 것은 아니라며 이에 대해 해명하였다. 그는 여성만의 조직을 만든 이유를 해명하였다.<ref name="parkeu3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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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학생운동과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 ====
===== 광주 학생운동 전후 =====
[[파일:광주학생운동 사건 당사자.png|썸네일섬네일|왼쪽|130px|[[1929년]] [[11월]] 당시 일본인에게 희롱당하던 여학생들과 박준채]]
{{참고|광주 학생 항일 운동|경성 제2차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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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학생 만세 운동 독려 =====
[[파일:Kimbyungro portrait.jpg|썸네일섬네일|왼쪽|120px|[[광주 학생 운동]] 관련자들을 변호한 [[김병로]] [[변호사]]]]
 
허정숙은 [[최복순]]에게 각 여학교 간부들에 연락, 이를 알리게 하고 서로 연락하는 일을 도왔다.<ref name="songhan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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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경성 만세 운동 주도 =====
[[파일:동아일보 광주학생운동.jpg|썸네일섬네일|280px|right오른쪽|1929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광주학생 항일운동 당시의 격문을 다룬 내용이다.]]
{{참고|경성 제2차 만세 운동}}
[[1930년]] [[1월]] 초 이화여전 외에도 [[동덕여학교]], [[배화여전]], [[근화여자상업학교]], [[경성보육학교]], [[정신여학교]], [[실천여학교]], [[태화여자미술학교]], [[숙명여자고]]보 등의 여학생 수백 명이 이에 동조하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총독부]] [[경찰|경무국]] 밀정에게 정보가 입수되어 그해 말 1차 만세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차 만세 운동은 실패하였으나 구체적인 물증을 찾지못해 여학생들은 체포를 모면하였다 학생들의 비상연락망은 살아 있었고, 허정숙은 계속 사람들을 만나 두 번째로 만세 시위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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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 운영과 망명 결심 ====
[[파일:율전고무 파업 사태 관련 뉴스.png|썸네일섬네일|오른쪽|150px|[[율전고무]] 파업 사태를 보도한 [[매일신보]] 1933년 05월 05일자 기사]]
 
출소 이후 그는 감옥에서 배운 의학지식을 활용, 태양광선치료소 병원을 경영한 것으로 이어지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1932년]] 둘째 아들 송길한과 어머니 정긍자가 병으로 사망했다.<ref name="shinyoung138"/> 허정숙은 직접 침을 놓을 줄 알았고, [[뜸]]을 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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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의 활동 ====
===== 중국 망명 초반 =====
[[파일:Joseonuiyonggun1945.PNG|섬네일|left왼쪽|160px|[[조선의용군]]]]
[[파일:Choi Chang-ik.jpg|섬네일|right오른쪽|160px|[[최창익]]]]
 
{{본문|조선의용군|조선독립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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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
==== 광복 직후 ====
[[파일: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일동.PNG|섬네일|right오른쪽|180px|[[1947년]] [[7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청사 앞에서 (앞줄 맨 왼쪽은 [[최용건]], 세 번째부터 [[김책]], [[김일성]], [[김달현]], 허정숙, [[리강국]] 순)]]
{{참고|조선신민당|조선독립동맹|북조선인민위원회|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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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협상 전후 ====
[[파일:1948년 허정숙.PNG|섬네일|left왼쪽|140px|[[1948년]] [[남북 협상]]에 참석하여 여성단체를 대표해 축사를 낭독중인 허정숙 (1948.04.10)]]
[[파일:스티코프, 김일성, 윤레나, 박헌영, 허정숙.jpg|썸네일섬네일|160px|오른쪽|[[박헌영]]의 결혼식 축사를 낭독하는 김일성, 왼쪽 두 번째 앉은 이는 스티코프, 가운데 일어선 이는 김일성, 옆으로 윤레나와 박헌영 부부, 허정숙 순 ([[1949년]] [[9월]])]]
{{참고|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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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조선 정부 수립 =====
[[파일:Northkoreank1.jpg|섬네일|왼쪽|200픽셀|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허정숙 (첫째 줄 왼쪽 끝)]]
[[파일:Heo Jong-suk and Kim Jong-suk ather in Pyungyang.jpg|썸네일섬네일|300px|1948년 11월 평양 주둔 소련군 철수 직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김일성 부인 김정숙(가운데), 장남 김정일(당시 6세), 허정숙 문화선전성상, 박정애 북로당 중앙상무위원 겸 부녀부장(왼쪽 첫 번째와 두 번째)등 여성 지도자들과 소련군 고위장성 부인들의 석별 기념촬영]]
{{참고|최고인민회의|조선로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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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해방 운동과 여성의 직업 참여론 ===
[[파일:Heo Jongsuk and Park Jongae.jpg|썸네일섬네일|오른쪽|180px|허정숙과 [[박정애]]]]
{{참고|여성 해방 운동|양성 평등}}
허정숙은 여성 해방의 방법으로 경제력을 제시했다. [[여성]]이 [[가정]]과 [[사회]]로부터 독립, 해방되려면 [[경제적 독립]]과 [[정신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보고 [[1920년]]대, [[1930년]]대 내내 강연 활동과 계몽 활동, 여성의 [[직업]] 참여를 호소했다.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특혜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남자들과 같은 환경, 같은 조건에서 일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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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동방노력자공산대학 동문]]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무신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