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이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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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시조 =
| 집성촌 =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 인물 = [[이종생]], [[이각 (조선)|이각]], [[이대원 (1566년)|이대원]], [[이덕일 (1561년)|이덕일]], [[이만운 (1723년)|이만운]], [[이돈명]], [[이건영 (1926년)|이건영]], [[이균범]], [[이영일 (1939년)|이영일]], [[이원범]], [[이계철 (1940년)|이계철]], [[이신범]], [[이용섭]], [[이강수]], [[이계훈]], [[이계안]], [[이길범]], [[이치범]], [[이재훈 (1955년)|이재훈]], [[이상훈 (1956년)|이상훈]], [[이재갑]] [[이재원 (1958년)|이재원]], [[이병국 (1960년)|이병국]], [[이종범]], [[이정후]], [[이지행]], [[이서영]], [[이연정]]
| 년도 =
| 인구 = 157,102명
| 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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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이씨'''(咸平 李氏)는 [[전라남도]] [[함평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 역사(History) ==
『정묘보(丁卯譜)』 세록(世錄)편에 의하면 시조(始祖) [[이언]](李彦)이 고려 초에 벼슬이 신무위대장군(神 武衛大將軍)으로 종3품(從3品)에 오르고 함풍군(咸豊君)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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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지의 둘째 아들 이광봉(李光逢)은 충숙왕 때 삼한벽상(三韓壁上) 삼중대광(三重大匡)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고 함풍부원군(咸豊府院君)에 봉해졌다.
== 본관(Origin) ==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함평(咸平)이 발상지(發祥地)이고 시조(始祖) 이언(彦)이 함평(咸平)에서 득관(得貫)했기에 함평 이씨(咸平李氏)가 되었다.
원래 함평(咸平)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백제]]시대에는(660년) 굴내현(屈內縣)과 다지현(多只縣)으로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757년)에는 굴내현(屈內縣)이 함풍현(咸豊縣)으로 되고 다지현(多只縣)이 다기현(多岐縣)으로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함풍현(咸豊縣)은 존속되고 다기현(多岐縣)은 모평현(牟平縣)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조선 태종 9년(1409년)에 함풍현(咸豊縣)과 모평현(牟平縣)을 합하여 함평현(咸平縣)으로 개칭하였고, 1895년에 함평현(咸平縣)을 함평군(咸平郡)으로 개칭하였다. 그러기에 고려 초기 함풍현(咸豊縣)일때는 함풍 이씨(咸豊 李氏)라고 불러왔었고, 조선 태종 9년(1409년)에 함풍현(咸豊縣)이 함평현(咸平縣)으로 개칭되면서부터는 함평 이씨(咸平 李氏)로 불러오고 있다. 지금도 외지에서는 함풍이씨(咸豊李氏)라고도 부르고 있으나 이는 다 함평 이씨(咸平李氏)이다.
== 인물(Characters) ==
* '''[[이각 (조선)|이각]]'''(李珏, ? ~ 1592년) : [[임진왜란]]이 시작된 시기에 [[경상도|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였으나 패전의 [[책임]]으로 인해 [[참수]]당하였다.
* '''[[이대원]]'''(李大源, 1566년 ~ 1587년) : 조선 선조 16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남해안에 출몰한 왜적을 추격하여 적장을 사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흥양지방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백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3일간의 혈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포로가 됐으나 항복을 거부하고 순국했다. 그의 충정을 기리는 뜻에서 쌍충사(雙忠祠)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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