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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후에 조약'''(Treaty of Huế) 또는 '''보호령 조약'''은 [[1884년]] [[6월 6일]] 프랑스 대표 쥘 파트노트르(Jules Patenôtre) 와 베트남 대표 팜턴주엇(Phạm Thận Duật), 똔텃판(Tôn Thất Phan), 응우옌반뜨엉(Nguyễn Văn Tường)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다. 이 조약은 [[1883년]] [[8월 25일]]의25일의 징벌적 '''[[아르망 조약]]'''의 주요 항목을 재론한 것이며, 이 조약의 가혹한 조항 중 일부를 완화시켰다. [[안남]]과안남과 [[통킹]]을통킹을 보호령으로 만든 토대가 된 이 조약은 향후 70년 동안 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지 통치를 위한 것이었고, 프랑스 장관인 [[쥘 파트노트르]]가 협상을 담당했기 때문에 종종 '''파트노트르 조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베트남에서는 '''갑신화약'''(호아으억잡턴/甲申和約, Hòa ước Giáp Thân)이라고 부른다.
 
==배경==
1884년 6월 6일, 청나라와의 〈톈진 협약〉이 체결된 지 3주 후, [[청나라]]는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역사적인 종주권을 암묵적으로 포기하였고, 프랑스는 안남과 통킹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령을 규정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새로운 프랑스 장관인 [[파트노트르]]가파트노트르가 협상을 담당하였다.
 
새로운 조약은 통킹에서 프랑스의 상업적 특권을 제한한 악명 높게 모호한 〈필라스트르 조약〉([[1874년]] [[3월 15일]]에15일에 체결된 [[사이공 조약]])을 대체했다. 프랑스 의회가 비준하지 않은 1883년 8월의 〈아르망 조약〉에 포함된 많은 조항들은 온건한 언어로 재구성되었지만, 안남과 통킹에 대한 프랑스 보호령을 확립하고, 대부분의 베트남 마을에 프랑스 주민을 거주할 수 있게 허용했다. 또한 프랑스에 어느 정도의 무역 특권을 부여했다.
 
1884년 1월 프랑스 외교관 [[아서 트리쿠]]가 [[후에]]를 방문하여 베트남 정부로부터 개정된 〈아르망 조약〉을 비준받았다. 트리쿠는 아르망 조약의 더 부당한 조항 중 일부는 베트남인의 진심을 보여주면 개정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으며, [[ 1884년]] [[1월 1일]] 베트남 정부는 아르망 조약에 완벽한 준수를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조항 중 일부는 나중에 더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프랑스 공화국의 선의를 신뢰하라고 명기되어 있었다.<ref>Huard, 246</ref>
 
프랑스 외무성의 관점에서 〈아르망 조약〉의 가장 문제가 되는 측면 중 하나는 베트남에게 [[코친차이나]]와 [[통킹]]에게 4개의 지역을 병합하는 영토 양도를 부과했다는 것이다. 이 조항들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철저한 정복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아르망의 개인적인 견해를 반영했다. 이는 외무부가 보호령을 통해 프랑스가 간접적으로 베트남을 통치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편하다고 생각한 견해는 아니었다. 이에 따라 제3조와 제16조에 의거하여 프랑스는 베트남의 내부 관할권에 아르망 조약이 1년 전에 프랑스 통제로 이양된 [[응에안 성|응에안]], [[타인호아 성|타인호아]], [[하띤 성|하띤]] 및 [[빈투언 성]] 지역을 되돌렸다.<ref>Billot, 178–8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