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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파 왕국의 역사는 중국 사료·참파 비문·참파 사서에 기록이 남아 있다. 참파 비문에는 옛 참파어를 인도계 문자로 기록한 것과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한 것이 있다. 옛 참파어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하나로, 현재의 [[:en:Acehnese language|아체어]]와 비슷한 언어이다. [[캄보디아]] [[시엠리아프]] [[앙코르]] 유적인 [[바이욘]]의 부조에 [[참파]]와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베트남 중부 지역은 중국 [[동한]] 시기에는 [[교주 (중국)|교주]](交州)에 속하였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서기 [[192년]] [[한나라]] 최남단, [[일남군]] [[:zh:象林縣|상림현]] ─북중부, 현재의 [[후에]] 부근)에서 공조로 있던 몽크메르의 일족인 쿠리엔([[:vi:Khu Liên|Khu Liên]])이라는 관리가 참족 수천명을 거느리고 상림현을 공격하고 현령을 죽이는 반란을 일으켜 일남군 일대를 점령하여 스스로 임읍왕(林邑王)이라 부르고, 그 땅을 임읍(Lâm Ấp)이라고 칭함으로서, 임읍을 세웠다. 임읍은 중국 남조에 조공을 바쳤고, 초창기에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隋)나라의 양제는 605년(대업(大業) 원년)에 참파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수는 육군과 해군의 공동 작전으로 참파의 수도를 점령하고 조공국으로 삼았다. 참파는 [[앵무새]]를 [[당 태종]]에게 바쳤다(626년 그의 재위시부터 631년 사이)는 기록도 있다. 당나라 때의 문헌에 의하면, 이 시기에 ‘占波’(점파), ‘瞻波’(첨파)와 같은 이름으로도 불린 적이 있다. <ref>[[의정 (승려)|의정]],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권하(卷下)《형주혜명선사(荊州慧命禪師)》조(條)에 ‘泛舶行至占波,遭風而屢遘艱苦’(큰 배를 띄워 점파까지 가다가, 바람을 만나고 여러 번 어려움을 만났다.)라는 구절이 있다.</ref> <ref>의정, 《대당서역구법고승전》 권하 《형주법진선사》조(條)에 ‘遂附舶東歸,有望交阯。覆至瞻波(原註:即林邑國也)’(마침내 큰 배를 따라 동쪽으로 돌아오니, 또한 교지를 바라보았다. 다시 첨파(즉, 임읍국이다)에 이르렀다.) 라는 구절이 있다.</ref> 당나라 중기에, 그 나라 이름을 환왕(環王)이라고 고쳤다. 9세기 이후에 이르러, 이 나라는 점성(占城)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현재의 중국과 베트남의 사료 중에 출현한다. 점성(占城)은 [[산스크리트어]] 참파푸라(占婆補羅, ampapura)와 참파나가라(占婆那喝羅, Campanagara)의 약칭인데, 그 중 "pura", "nagara"는 산스크리트어로 읍(邑), 성(城)이란 뜻이다. 점성은 본래, 이 나라의 국왕이 거주하는 곳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참파는 곧 지금의 베트남 남부·[[캄보디아]]에 걸쳐 존재한 교역국 [[부남]]의 영향을 받아 [[힌두]] 문명을 받아들였고, 중계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인도인의 내왕이 많아 카스트 제도를 비롯하여, 인도의 여러 제도가 채용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힌두교·불교의 유적이 참파의 인도화의 일면을 전해주고 있다. 이 당시에 중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임읍의 승려 [[:ja:仏哲|붓테츠]]가 전래한 참파의 무용, 임파락은 지금도 아악의 일종으로 전승되고 있다.
 
베트남 남부·캄보디아에서 부남이 쇠약해져 [[진랍]](Chên Lặp, [[앙코르 왕조]])이 발흥한 7세기 초, 임읍에서도 정변이 일어나 참파가 나타났다. 점성(Chiêm Thành)이란 명칭은 산스크리트어 참파나가라의 축약된 음역이다. 미선([[:vi:Mỹ Sơn|Mỹ Sơn]]) 성역에 현존하는 비문에 의하면 진랍과 점성 두 왕가는 모두 《[[마하바라타]]》에서 묘사된 [[:en:Kurukshetra War|쿠루크쉐트라 전쟁]]에서 패배한 인디아의 크루족([[카우라바]]) 측의 장수 [[:en:Ashwatthama|아슈왓타마]]의 자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