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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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추(金錘) 계-(추정) ==
=== 역사 ===
시조 '''김추'''(金錘)는 [[경순왕]]의 8자로, [[고려]]조에 상서령을 지내고 일선군(一善君)에 책봉(冊封)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는 [[경순왕]]의 8자가 '''김종'''(金鐘)이라 한다.
 
==== 시조에 대해 ====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8자 '''김종'''(金鐘)을 '''김추'''(金錘)라 개명(改名)하고, 시호를 작호(作號)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또한 '김종'(金鐘)(또는 '김추'(金錘))을 비롯한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8자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후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호가 구암(久菴)으로, 청백리청백리에 선정되고,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구암집》에 '''선산 김씨(들성)'''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한충]](漢忠)이라 하였다. 즉 [[원성왕]] 9세손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이 한다.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를 1세조(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중서령 '김성원'(金成元)의 아들로 [[고려]] 말 출사하여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역임하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는데,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사직을 개탄하여 관직을 버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으로 낙향하여 [[선산군]] [[옥성면]] 포상동(浦上洞) 하송산(下松山) 아래에 터를 잡고 살다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화의(和義)는 [[선산군|선산]](善山)의 별호라 한다.
 
이후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비좁은 골짜기를 벗어나 청룡산과 당산 줄기가 사방 20리나 병풍처럼 둘러싸인 남쪽 들판으로 옮겨 '들성'(坪城)이라 명하고 정착하여 500여년 세거지로 명성을 드높였다. '들성'(坪城)은 오늘날의 [[경북]] [[선산군]] 고아면 원호동(元湖洞)이다. 이후 혹칭 '''들성(평성) 김씨'''(坪城 金氏) 라고도 한다.<ref>선산김씨 김추(金錘)계[[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ref>
 
현손 이조참판 '김광좌'(金匡佐)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세인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이후 6파(派)로 나뉘어 졌다.
 
==== 시조의 선계에 대해 ====
☞ [[삼척 김씨]](三陟 金氏)도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를 [[경순왕]]의 8자 삼척군(三陟君) '''김추'''(金錘)라 한다. 《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도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김씨(金氏)계는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시조 '''김추'''(金錘)에 대해서는 각종 자료 및 견해가 난무하는 관계로 좀더 고증을 거쳐야 될 것으로 보인다.<ref>[[1939년]](소화 14) 경상북도 선산 김씨(善山 金氏) 대종회에서 발행한 선산 김씨(善山 金氏) 족보(族譜) 상권(上卷)에는 시조 1세를 '''김기'''(金起)로 하고 있으면서, 『단천족보(端川族譜)』 고전(考傳) 기록에 경북 선산 남종파(南宗派)에서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할 때 함경북도 북종파(北宗派)에서 시조를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제8남 김추(金錘)의 후손(後孫)이다.”라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라면서 의심할 “의(疑)” 자를 기록해 놓았다.[三陟金氏와 善山金氏 貫祖에 대한 硏究 및 文獻의 考察 -各種 文獻 考證을 中心으로- 白松 金宰弘/三陟金氏譜學硏究會硏究委員] </ref>
이후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는 [[경주경순왕]]의 김씨8자 삼척군(三陟君) '''김추'''(金錘)라 한다. 조선 후기 [[1784년]] 일문개성 족보류에어느 8자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에는 [[경순왕]]의 8자가 '''김종'''(金鐘)이라 한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김종'(金鐘)을 '김추'''(金錘) 개명(改名)하고, 시호를 작호(作號)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또한 '김종'(金鐘)( 또는 '김추'(金錘))을 비롯한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8자들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삼척 김씨]](三陟 金氏)도 시조 '김위옹'(金渭翁)의 아버지를 [[경순왕]]의 8자 삼척군(三陟君) '''김추'''(金錘)라 한다. 《증보문헌비고》·《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에도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김씨(金氏)계는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시조 '''김추'''(金錘)에 대해서는 각종 자료 및 견해가 난무하는 관계로 좀더 고증을 거쳐야 될 것으로 보인다.<ref>[[1939년]](소화 14) 경상북도 선산 김씨(善山 金氏) 대종회에서 발행한 선산 김씨(善山 金氏) 족보(族譜) 상권(上卷)에는 시조 1세를 '''김기'''(金起)로 하고 있으면서, 『단천족보(端川族譜)』 고전(考傳) 기록에 경북 선산 남종파(南宗派)에서 족보(族譜)를 편찬(編纂)할 때 함경북도 북종파(北宗派)에서 시조를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제8남 김추(金錘)의 후손(後孫)이다.”라는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라면서 의심할 “의(疑)” 자를 기록해 놓았다.[三陟金氏와 善山金氏 貫祖에 대한 硏究 및 文獻의 考察 -各種 文獻 考證을 中心으로- 白松 金宰弘/三陟金氏譜學硏究會硏究委員] </ref>
=== 시조에 대해 ===
후손 '''김취문'''(金就文. 1509 ∼ 1570)은 호가 구암(久菴)으로, 청백리,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구암집》에 '''선산 김씨(들성)'''의 먼 조상의 휘가 [[김한충|한충]](漢忠)이라 하였다. 즉 [[원성왕]] 9세손 '''김한충'''(金漢忠)의 후손이 한다.
 
=== 분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