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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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추(金錘) 계-(추정) ==
=== 역사 ===
시조 '''김추'''(金錘)는 [[경순왕]]의 8자로, [[경순왕]]과 [[고려 태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말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를 1세조(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중서령 '김성원'(金成元)의 아들로 [[고려]]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비좁은 골짜기를 벗어나 청룡산과 당산 줄기가 사방 20리나 병풍처럼 둘러싸인 남쪽 들판으로 옮겨 '들성'(坪城)이라 명하고 정착하여 500여년 세거지로 명성을 드높였다. '들성'(坪城)은 오늘날의 [[경북]] [[선산군]] 고아면 원호동(元湖洞)이다. 이후 혹칭 '''들성(평성) 김씨'''(坪城 金氏) 라고도 한다.<ref>선산김씨 김추(金錘)계[[http://www.shinjongwoo.co.kr/html/search.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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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
* 김중곤(金仲坤) : 조선 때 절충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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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원]](金孝元) : 조선 전기의 문신, 이조전라, 이조전랑 추천과 임명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심의겸]]과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사림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어 었다.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전배(前輩)는 대부분 서인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後輩)는 동인이 되었다.
* '''김원섭'''(金元燮. 1640 ∼ 1710) : 자는 지화(至和). 아버지는 한성우윤 김하량(金廈樑)이다. 1672년(현종 1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에 들어갔으나.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로 남인이 실각하자 관직에서 쫓겨났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다. 대동법 시행과정에서 빚어지는 여러 민폐를 시정할 것 등, 평소에 생각한 바를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어 장문의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유학(幼學) 김인(金寅) 등의 고변서(告變書)에 신천군수(信川郡守) 윤희(尹熺)와 서찰을 통한 것으로 무고되었다. 결국 역모를 한 것으로 몰려 몇 차례의 국문을 받고 먼 변방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 김녕(金寧. 1567 ~ 1650) : 조선 중기의 문신, 전적·사예·예안현감, 한강(寒岡) [[정구 (1543년)|정구]](鄭逑)에게서 『근사록(近思錄)』과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수업하고,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기도 하다.
* 김의원(金義元. 1558 ~ ?) : 조선 중기의 문신, 김효원(金孝元)의 동생이다. 이조좌랑·장령(掌令)·직강(直講)·이조정랑·교리(校理)·보덕(輔德)·악정(樂正)·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 김세렴(金世濂. 1593 ~ 1646)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 도승지, 호조판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에 반대했고, [[인조반정]] 뒤에는 공물의 방납 폐단을 시정하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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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묵(金正默. 1888 ~ 1944) : 일명 해산(海山)·규환(奎煥).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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