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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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건륭제
|그림=Portrait of the Qianlong Emperor in Court Dress.jpg
|본명=아이신 교로 훙리
|본명=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
|재위=1735년 ~ 1796년
|황후=[[효현순황후]]<br />[[계황후]]<br />[[효의순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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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Prince Bao.jpg|섬네일|오른쪽|보친왕 시절의 건륭제]]
'''건륭제'''(乾隆帝, 강희(康熙) 50년 [[음력 8월 13일]] ([[1711년]] [[9월 25일]]) ~ 가경(嘉慶) 4년 [[음력 1월 3일]] ([[1799년]] [[2월 7일]]))는 [[청 제국]]의 제6대 [[황제]](재위 1735년 ~ 1796년<ref>1796년은 양력의 세년법을 따른 것이다. 건륭제는 1795년(건륭 60년) [[음력 12월 30일]], 즉 양력으로는 1796년 2월 9일에 황위에서 퇴위하였다.</ref>)이다.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네번째의 황제이기도 하다. [[성씨|성]]과 [[휘]]는 '''아이신 교로 훙리'''({{llang|mnc|{{MongolUnicode|ᡝᠠᡳᠰᡳᠨ<br>ᡤᡳᠣᡵᠣ<br />ᠾᠦᠨᠭ<br> ᡀᠢ}}|Aisin Gioro Hung li}}, [[한자|愛新覺羅弘曆|애신교라 홍력]]), [[묘호]]는 '''고종'''(高宗, {{llang|mnc|{{MongolUnicode|ᡬᠠᠣᡯᡠᠩ}}|G'aodzung}}), [[시호]]는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부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짧은 시호로는 '''순황제'''(純皇帝, {{llang|mnc|{{MongolUnicode|ᠶᠣᠩᡴᡳᠶᠠᡥᠠ<br>ᡥᡡᠸᠠᠩᡩ}}|Yongkiyaha Hūwangdi}})이며, [[연호]]는 '''[[건륭]]'''(乾隆, {{lang|mnc|{{MongolUnicode|ᡥᡡᠸᠠᠯᠠᠪᡴᠠᡳ<br />ᡳᠶᠠᠰᡠᠨᡨᠣ}}|Abka-i Wehiyehe}})이다. [[만주어]]로는 압카이 워혜허 한({{lang|mnc|{{MongolUnicode|ᡥᡡᠸᠠᠯ<br />ᡳᠶᠠᠰᡠᠨᡨᠣ<br />ᠾᠠᠨᠸᡝᡥᡳᠶᡝᡥᡝ}}|Abkai Wehiyehe Han}}), [[몽골어]]로는 텡그린 테게센 칸({{lang|mn|{{MongolUnicode|ᠨᠠᠢᠷᠠᠯᠲᠲᠥᠲᠩᠷᠢ ᠶ᠋ᠢᠨ<br />ᠤᠺᠬᠠᠨᠨ<br />ᠺᠬᠠᠨᠨᠲᠡᠳᠭᠦᠭ᠍ᠰᠡᠨ}}|TengerinTengeri yin Tetgesen Khaan}})이다.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의 손자이자 제5대 황제인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이며<ref>작위를 받은 기준에 따라 황사자(皇四子)로 불리나, 유아기에 죽은 옹정제의 황자까지 포함시키면 건륭제는 옹정제의 다섯 번째 아들이 된다.</ref>, 옹정제의 후궁 출신인 [[효성헌황후|효성헌황후 뇨후루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의 소생이다.
 
어릴 때부터 제왕이 지녀야 할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문화 사업으로는 옹정제 때 [[마카오]]로 추방된 [[로마가톨릭]]교회 산하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북경]]에 [[유럽|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것과 특히 예수회 수도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을 개·보수를 감독하게 한 것이 있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의 역사|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써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나라의청 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중가르 칸국|중가르준가르]]와 [[위구르족|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 (청나라)|화신뇨후루 허션]]을 20여 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나라는청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6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이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
 
== 생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