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만종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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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rancesco Hayez 023.jpg|섬네일|right|시칠리아의 만종 (1846), 프란체스코 아예스 작품]]
 
'''시칠리아 만종 사건'''({{llang|it|Vespri siciliani}}, {{llang|scn|Vespiri siciliani}}, {{llang|an|Vespras Secilianas}}, {{llang|ca|Vespres Sicilianes}})은 [[1282년]] [[부활절]](3월 30일)에 [[시칠리아 왕국]]에서 [[프랑스앙주 왕국카페가]] 출신의 <ref>[[카페 앙주가카페가]]의 분가</ref>의 시조 [[카를루 1세]]에게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이다. 6주에 걸쳐 이어진 반란에서 3천여명의 프랑스인들이 살해당했고, 카를루 1세는 왕국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은 후에 [[아라곤 연합 왕국]]([[트리나크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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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Vespro22.jpg|섬네일|right|팔레르모 성령 교회]]
 
부활절 월요일인 1282년 3월 30일, 팔레르모의 주민들은 도시 성벽 밖에서 축제를 열고 있었다. 당시에 카페 앙주가의 왕 카를루 1세를 대신하여 시칠리아를 지배하던 프랑스인들은 이 축제가 위협적인 사태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하여 군사를 보냈다. 그 순간, 시칠리아인들에게 봉기를 알리듯, 팔레르모 성령 교회의 저녁 기도의 종소리가 팔레르모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팔레르모에서 반란 지도자가 선출된 후, 시민들은 압제자가 반격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반란군은 2주만에 시칠리아 섬의 대부분을 장악했고, 6주 뒤에는 [[메시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반란군의 손에 떨어졌다. 4월 28일 메시나까지 함락시킨 반란군은 항구에 있던 카를루 1세의 함대를 불태웠다.<ref>Runciman, Sicilian Vespers, p. 21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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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축복 하에 카를루 1세는 왕위를 회복하기 위해 나폴리에서 함대를 보내 메시나 항을 봉쇄했다. 그러나 카를루의 군대는 페로가 이끄는 아라곤 군의 습격을 받아 시칠리아를 포기하게 된다.
 
이후 20년 동안, 카페앙주 앙주가카페가 및 교황 세력이 한 편이 되고 아라곤 왕들이 다른 한 편에 서서 벌인 시칠리아 만종 전쟁이 지중해 전역을 휩쓸었다. 이 싸움은 1302년 [[칼타벨로타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끝이 났다. 조약에 의해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섬과 남부 이탈리아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고, 두 왕국 전부 시칠리아 왕국으로 주장하지만 학계에선 이를 분리시켜 전자는 [[트리나크리아 왕국]], 후자는 [[나폴리 왕국]]으로 불리게 된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