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김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0번째 줄:
후손 김공우(金公瑀)대에 와서 크게 번창하였는데, 그의 아들 용비(龍庇)·용필(龍弼)·용주(龍珠) 형제대에 이르러 세계(世系)가 갈린다. 장자 '''김용비'''(金龍庇)는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몽진했을 때 의성 일원에서 도적들을 물리치고 민심을 수습한 공으로 추절 보절공신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었으며, 금자 광록대부(金紫 光祿大夫) 태자 첨사(太子 詹事)를 지냈다.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3자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장자 김용비(金龍庇)계에서 조선 전기 무신조선조 맹암(孟巖) 김영렬(金英烈), 남파오봉(南坡鰲峯) 김광부김제민(金光富齊閔), 문절칠봉(文節) 김용초(金用超), 문신 괴정(槐亭) 김숙검(金叔儉), 오봉(鰲峯) 김제민김희삼(金齊閔希參), 학봉(鶴峰) [[김성일 (1538년)|김성일]](金誠一), 칠봉(七峯) 김희삼(金希參), 개암(開岩) 김우굉(金宇宏),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태천서산(苔川西山) 김지수(金地粹), 조선말 유학자 김흥락(金興洛)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창숙]](金昌淑)등이 배출되었다.
 
차자 김용필(金龍弼)계애서는 대제학 모재(慕齋) [[김안국]]·사재(思齋) [[김정국 (1485년)|김정국]] 형제 등이 배출되었다.
55번째 줄:
* 김희삼(金希參): 조선 중기 문신·학자, 호(號) 칠봉(七峯), 삼척부사(三陟府使), 아들 넷중 우홍(宇弘)·우굉(宇宏)·우옹(宇顒) 3형제가 문과에 합격 4부자 대과에 오름, 이조판서 추증, 천곡(川谷) 향현사(鄕賢祠) 제향
* 김제민(金齊閔): 조선 중기 문신, 호 오봉(鰲峰), 시호 충강(忠剛), 일제(一齋) 이항(李恒) 문인, 선조 때 문과 급제, 순창군수, 임진왜란 때 아들 3형제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출전, 이조판서 추증, 장성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와 정읍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
* 김희삼(金希參)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호는 칠봉(七峰),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옹원정(司甕院正)·삼척부사(三陟府使)·통정(通政)에 오름, 아들 우홍(宇弘)·우굉(宇宏)·우용(宇容)·우옹(宇顒) 4형제가 효우(孝友)로 이름이 알려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천곡(川谷)의 향현사(鄕賢祠)에 제향
* [[김성일 (1538년)|김성일]](金誠一): 조선 중기 문신, 호 학봉(鶴峯), 시호 문충(文忠), [[1590년]] 일본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파견되어 보고할때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 보고하자, 이와 달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전 보고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유성룡]](柳成龍)등의 간청으로 경상우도 초유사에 임명, [[1593년]] 4월 경상우도 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전염병으로 죽음, 이조판서 추증, 안동 호계서원(虎溪書院),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등 제향
* [[김우옹]](金宇顒): 조선 중기 문신·학자, 호 동강(東岡), 시호 문정(文貞), 남명 [[조식]](曺植) 문인, [[1567년]] 식년문과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 대사성, 예조참판, 이조판서 추증, 청주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등 제향